1507년(중종 2)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2년 뒤에 정언(正言)이 되었고, 1513년에 지평(持平)으로 일시 경기도도사에 임명되어 진상(進上)의 전결분정(田結分定)에 따른 폐단의 개선을 건의하였다.
그 뒤 장령을 거쳐 1519년 7월에 승정원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이 때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 대간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같은 해 11월에 기묘사화가 발생했을 때, 사헌부집의로서 조광조 일파가 득세할 때 심히 교만하고 방종했다고 비난하고, 현량과(賢良科)의 폐지와 그 급제자의 파방(罷榜)을 주장하는 등 적극적으로 조광조 일파를 공격하였다.
그 뒤 동부승지 · 참찬관 · 강원도관찰사 · 대사간 · 이조참의 등을 거쳐 1525년 12월에는 특별히 통정대부에 승진하면서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외직에 나갔다. 이어서 우부승지 · 병조참판 및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겸하고, 예조판서 · 우참찬 · 대사헌 · 이조판서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이조판서 재직 시에는 간신인 병조판서 이기(李芑)의 비행을 공격했는데, 이것이 후일 이기의 모함을 받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어서 우찬성 · 좌찬성에 올랐고 1541년 11월에는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 임명은 중원(中原)에서 오랑캐〔㺚子〕의 침입과 같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자, 중신을 파견해 축성(築城) · 입거(入居) 문제의 처리와 사신 왕래에 따른 폐단 제거 등을 해결하고자 하는 왕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
그 뒤 인종이 즉위하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승진하였다. 명종이 즉위하면서 윤원형(尹元衡) · 이기 등의 모함으로 일어난 을사사화에서 윤임(尹任) · 유인숙(柳仁淑) 등과 함께 삼흉(三兇)으로 몰려, 종사(宗社)를 모위(謀危)했다는 죄목으로 처벌받았다. 처음에는 절도유배형(絶島流配刑)에 처해져 서천으로 귀양갔지만, 온양에 이르러 사사(賜死)되었다. 1570년(선조 3) 신원되었으며, 1577년 복작(復爵)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