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임지(任之). 아버지는 중종의 장인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 윤여필(尹汝弼)이며,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오빠이다.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경주부윤이 되었다. 1523년(중종 18)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왜선과 싸우다가 패하여 충군(充軍)되었다.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경원대군(慶源大君: 뒤에 명종)을 낳자, 김안로(金安老)와 함께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문정왕후와 알력이 생겼다.
1543년(중종 38)부터 대윤(大尹)·소윤(小尹)으로 나누어 싸움이 노골화되면서 대윤의 거두가 되었다. 1544년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형조판서를 거쳐 찬성에 올랐다. 그러나 재위 8개월 만에 인종이 죽자, 1545년(명종 즉위년) 명종이 12세로 즉위하여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이때 소윤 윤원형(尹元衡) 일파는 소위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평소 반목하던 대윤 일파를 모두 숙청하였으며, 마침내 윤임은 남해로 귀양가다가 충주에 이르러 사사(賜死)되었다.
훗날 대의라는 측면에서 볼때 윤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이이(李珥)는 사직에 대한 죄가 없다 하였고, 이황(李滉)은 사직에 대한 죄가 없지 않다고 하였다. 1577년(선조 10)에 신원(伸寃)되었고, 시호는 충의(忠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