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식은 조선전기 문신으로 형조좌랑, 장령 등을 역임한 학자이다. 1482년(성종 13)에 태어나 1520년(중종 15)에 사망했다. 서울 출신으로 1501년 진사에 입격하였다. 안당의 천거로 조광조 등과 함께 관직에 나갔다. 1519년 현량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사성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기묘사화로 인해 선산에 유배되었다. 이후 신사무옥에 연좌되어 절도로 이배된다는 소식을 듣고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다. 조광조와 함께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개혁정치에 앞장섰다. 명종 때 복관되었고, 선조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노천(老泉), 호는 사서(沙西) · 동천(東泉) 또는 정우당(淨友堂). 아버지는 생원 김숙필(金叔弼)이며, 어머니는 사천 목씨(泗川目氏)이다.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서울에서 자랐으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열중해 1501년(연산군 7)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관심이 없었고 성리학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 뒤, 정치적 분위기를 일신하려는 시대의 추이에 따라, 조광조(趙光祖) · 박훈(朴薰) 등과 함께 성균관과 이조판서 안당(安瑭)의 천거로 종6품직인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에 서용되었다. 이어 형조좌랑 · 호조좌랑 · 지평(持平) ·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4월 조광조 · 김정(金淨) 등 사림파의 건의로 실시된 현량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당시 현량과의 천거 명목에는 성품 · 기국 · 재능 · 학식 · 행실 · 행적 · 생활 태도 또는 현실 대응 의식 등의 일곱 가지가 있었다.
그런데 급제자 28인 가운데 유일하게 7개 항목에서 모두 완벽하게 평가받았다. 이는 당시 사림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얻고 있었고, 또 중앙에 이미 진출해 있던 사림파 중에서도 조광조에 버금갈만한 인물로 평가되었음을 뜻한다.
그리하여 급제자 발표 닷 새 만에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이 되었고, 며칠 뒤에는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에 올랐다. 그것은 현량과 실시로부터 겨우 보름 사이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조판서 신상(申鏛)과 우의정 안당은 이에 만족하지 못해 대사성에 추천했으나 중종은 이들의 주청을 물리치고 홍문관부제학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신상과 안당의 거듭된 상계(上啓)로 마침내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그 해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절도안치(絶島安置)의 처벌이 내려졌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비호로 선산(善山)에 유배되었다.
뒤따라 일어난 신사무옥에 연좌되어 다시 절도로 이배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거창에 숨었다가 "해는 기울어 하늘은 어둑한데 텅빈 산사위에 구름이 떠가네 군신간의 천년의 의리는 어느 외로운 무덤에 있는가(日暮天含黑 山空寺入雲 君臣千載義 何處有孤墳)"라는 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기묘사화 후에 현량과가 폐지되면서 직첩과 홍패도 환수되었으나 명종 때 복관되었으며, 그 뒤 선조 때에 이조참판을 거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당시 사림의 영수로 숭앙된 조광조와 학문적 · 인간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연결을 바탕으로 훈구 세력의 제거에 앞장섰으며, 조광조와 함께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개혁정치를 폈다. 그 내용으로는 미신 타파, 향약 실시, 정국공신(靖國功臣)의 위훈 삭제(僞勳削除) 등을 들 수 있다.
문인으로는 신명인(申命仁) · 오희안(吳希顔) · 목세칭(睦世秤) · 김윤종(金胤宗) · 조경(趙瓊) · 홍순복(洪舜福) · 윤광일(尹光溢) · 이세명(李世銘) · 신영(申瑛) · 김덕수(金德秀) 등이 있다.
양근(楊根)의 미원서원(迷原書院), 청풍의 황강서원(凰岡書院), 거창의 완계서원(浣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