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대용(大用), 호는 위암(韋庵). 좌의정 신개(申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관찰사 신자준(申自準)이고, 아버지는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 신말평(申末平)이다. 어머니는 영의정 권람(權擥)의 딸이다.
1498년(연산군 4)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03년 세자 책봉을 기념한 별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 곧 예문관검열을 거쳐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가 되고 춘추관편수관을 겸해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편찬에 최연소자로 참여하였다. 1508년(중종 3)에 예조정랑이 되었고 사간원헌납·홍문관교리·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홍문관부응교를 거쳐 1512년 홍문관응교가 되었다. 이후 승진은 순조롭게 이루어져서 사인(舍人)·사간·사복시정(司僕寺正)·직제학·부제학·동부승지·도승지·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에 한성판윤이 되었으나 곧 이조판서에 발탁되었다.
이 때 이장곤(李長坤)과 함께 전선(銓選)을 맡아 조광조(趙光祖)·김식(金湜)·김정(金淨)·김구(金球) 등을 비롯한 사림파 학자들의 등용에 크게 노력하였다. 또, 이 시기 조광조 등의 사림파와 남곤(南袞) 등 훈구세력의 대립이 첨예화되자 양파의 중재, 조절에 노력하였다. 이후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이 피죄되자 그들의 구명에 크게 노력하였다.
그러나 자신도 사화의 와중에 휩쓸려 파직되지는 않았지만. 요직에서 밀려나 산질(散秩)에 머물게 되었다. 그 뒤 경기·전라·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529년에 형조판서가 되었지만 병으로 사직하였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