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 ()

계원필경
계원필경
한문학
개념
중국의 문자인 한자로 기록된 문학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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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한문학은 중국의 문자인 한자로 기록된 문학양식이다. 한글이라는 고유의 문자가 없을 때는 물론이고 한글 창제 후에도 조선시대의 양반을 중심으로 중국의 문자와 문학형식을 빌려 많은 문학작품을 창작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사상·감정이나 풍토·지리·풍속 및 역사적 사건들은 모두 우리의 것이라는 점에서 중국문학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문학으로서의 한문학은 고려시대에 그 기틀이 마련되고 조선시대에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양반관료체제가 붕괴하고 서구문물이 유입되면서 근대화의 물결이 몰아치자 한문학은 급속히 퇴조하게 된다.

정의
중국의 문자인 한자로 기록된 문학양식.
개설

우리는 한문·한문학·한학이라 하여 아무런 저항감 없이 그 용어를 써오지만, 중국인의 처지에서 보면 이러한 용어사용은 어색한 점이 없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문당시(漢文唐詩)라 하여, 한문은 ‘한대(漢代)의 문장’이라는 뜻으로 썼고, 한학은 송학(宋學)에 대한 대칭으로 ‘한대의 유학(儒學)을 배경으로 한 제반 학문’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중국문자로 기술된 것은 한학 또는 한문학이라는 명칭으로 불러왔던 것은 이 땅에 한문 내지는 한문화가 옮겨지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 한대였고, 또 한나라의 세력은 중국을 대표할 만한 상징적 위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에 ‘한문학’이라는 용어가 유래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문학을 일반적으로 정의하자면 한자문화권(漢字文化圈)-중국을 비롯한 한국·일본·베트남 등의 나라에서 한자를 공용하여 형성된 문화영역-에서 생성된 일체의 문어체(文語體)의 시문장을 한문학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시야를 국한시켜 우리 나라의 한문학을 정의하자면, 중국의 문자와 문학형식을 빌려 우리 민족의 정서와 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문학을 지칭할 수 있으니, 한자문화권에 속한 다른 나라의 한문학에 비하여 개별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한문학의 특징

갈래로서의 특징

서구문명의 영향하에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로서는 문학이라고 하면 소설·시·희곡·수필 등을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동양과 서양의 문학은 출발부터 달랐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상기해 보면 그 주된 언급이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그리스의 비극에 주어지고 있다.

이에 비해서 한문학 갈래의 창시자라 볼 수 있는 조비(曹丕)나 육기(陸機)의 <전론논문 典論論文> 또는 <문부 文賦>를 보면 시(詩)·부(賦)·비(碑)·뇌(誄)·명(銘)·잠(箴)·송(頌)·논(論)·주(奏)·설(說) 등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문선 文選≫을 거쳐 ≪문심조룡 文心雕龍≫에서 이론적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후대로 내려올수록 그 영역이 넓어지고 세분화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동문선≫이 갈래의 전범이 되고 있으니,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辭)·부(賦)·고시(古詩)·율시(律詩)·절구(絶句)·배율(排律)·조칙(詔勅)·교서(敎書)·제고(制誥)·책문(冊文)·비답(批答)·표전문(表箋文)·계(啓)·장(狀)·노포(露布)·격문(檄文)·잠·명·송·찬(贊)·주의(奏議)·차자(箚子)·잡문(雜文)·서독(書牘)·기(記)·서(序)·설·논·전(傳)·발문(跋文)·치어(致語)·변(辨)·대(對)·지(志)·원(原)·첩(牒)·의(議)·잡저(雜著)·책제(策題)·상량문(上樑文)·제문(祭文)·축문(祝文)·소문(疏文)·도량문(道場文)·재사(齋詞)·청사(靑詞)·애사(哀詞)·뇌문(誄文)·행장(行狀)·비명(碑銘)·묘지(墓誌) 등이다. 이것들을 글의 성격별로 다시 묶어보면, 시부류(詩賦類)·논변류(論辨類)·주소류(奏疏類)·조령류(詔令類)·서발류(序跋類)·증서류(贈序類)·전지류(傳志類)·잡기류(雜記類)·사독류(私牘類)·소설류(小說類)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것들은 오늘날의 문학적 통념에서 보면 문예적인 것과 실용적인 것이 혼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에서 우선 시·소설·수필과 같은 문예물에 입각해서 간추려 보면 시부류·소설류·잡기류와 사독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문예학의 대상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여타의 유별(類別) 속에서도 얼마든지 그것을 가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지류는 전(傳)과 비문·묘표·행장에 이르는 광범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 중에서 전은 소설의 모태가 되는 서사성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서발류의 경우도 문집(文集)이나 시집(詩集)의 서(序)에는 그 속에 훌륭한 문학이론이 풍부하게 용해되어 있어, 비평문학의 보고(寶庫) 구실을 하고 있다.

그리고 실용문의 대표적인 유별이라 할 수 있는 논변류나 주소류라 할지라도 문학에 관해서 논한 것이거나 문학에 관해서 상주(上奏)한 것이 있다면 이 역시 귀중한 문학연구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통적인 한문학은 현대개념의 문학과는 매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오늘날에 되살려서 원형대로 재생산한다거나 옛날 사람들의 문학인식을 그대로 전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선인들의 문학정신이나 사상이 어떻게 굴곡, 발전해 왔고, 그것이 어떻게 국문학에 기여해 왔는가를 따지고, 또 한문학적인 방법을 수용하여 국문학을 어떻게 심화, 확대할 수 있는가를 강구하면 된다.

그 밖에 한문학의 장단점을 고찰하여 고전문학은 물론 현대문학이라 할지라도 그 장점을 이용해서 우리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 될 것이다.

국문학과의 관계

한국 한문학은 중국 사람들의 안목에서 보면 그들의 주변문학처럼 인식되기 쉽고, 한글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어딘지 걸맞지 않는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우리 국자(國字)로 창작된 문학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정은 서구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르네상스시대에 접어들면서 자국어를 표방하고 나서기 이전에는 그들 역시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문학을 창작해 왔던 것이다. 또한,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던 일본·베트남 등도 우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자를 문학행위의 도구로 사용해 왔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역사경험은 우리 민족의 의지의 결과라기보다 오히려 지정학적인 조건, 상층문화의 유입 등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우리 선인들이 중국에서 한자와 문학형식을 차용하여 문학활동을 하였지만, 그 속에 담긴 사상·감정이나 풍토·지리·풍속 및 역사적 사건들은 모두 우리의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상 우리 문학은 이중구조 속에서 발달해 왔다. 즉, 선비층은 한문을 구사했고 서민층은 한글을 구사했던 것이다. 그런데 민족문학이라 한다면 양자를 다 지칭해야 하고, 연구자들도 양자를 균형 있게 살펴야 함은 물론이다.

만일 한문학 유산을 우리 문자로 기술되지 않았으니 우리 문학이 아니라는 형식논리에 집착하여 특수한 역사상황을 무시한 채 국문학의 영역에서 배제하려 한다면, 결과적으로 국문학의 기형화를 초래하여 우리 문학은 그 양과 질에서 빈약함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형화’란 한문학과 한글문학은 너무도 밀착되어 있기에 한쪽을 베어 버리면 다른 한쪽도 불구가 되는 운명을 맞게 됨을 의미한다. 예컨대, 설화나 소설은 한문으로 기록된 것이 많은 분량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민족의 웅혼한 서사성이 그 속에 응집되어 있다. 그러므로 국문소설만을 가지고서는 우리의 서사적 맥락을 제대로 찾기가 어렵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정은 서정문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고려속요(高麗俗謠)를 비롯하여 얼마간의 시가라는 것이 있지만, 이것들은 양적으로 지극히 미미할 뿐만 아니라 자연발생적인 감정의 드러냄에 그친 것이어서 선문학적(先文學的)인 위치를 차지할 뿐이고, ‘시조’라는 것도 역시 유가 선비들의 여기적(餘技的) 소산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에 비해서 한시의 세계는 양적으로도 천문학적인 숫자에 이를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지극히 우수한 것이 많아서 명실공히 한국 서정문학의 주된 흐름을 담당하게 된다. 그 밖에 비평문학이나 문학사상, 그리고 민속 분야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자료가 한적(漢籍) 속에 실려 있는 실정이어서, 한문학을 뺀 민족문학은 생각조차 하기가 어렵다.

현재 우리의 한문학 유산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정확히 조사된 바가 없으나, 대략 도서목록에 수록된 양으로 보면 전적의 종류는 1만8000, 그리고 책의 수는 7만7000에 이른다.

이 속에 실려 있는 각종의 작품은 엄청난 숫자에 이르지만, 모두가 우리의 고전으로 향유할 만한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우선 문학적 가치가 있는 작품을 추려내고 정리하여 사적으로 체계가 완성될 때만 그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국문학의 영역과 광장이 넓어지고 나아가 우리 문화의 건전한 발전에 기여하는 바도 크게 될 터이다.

한국 한문학의 사적 흐름

상고시대의 한문학

문학이란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있어 왔다. 생활 속에서 피어나는 이야기와 그들의 감정을 표현한 노래가 그것이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나라도 처음에는 씨족이 중요한 단위를 이루다가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서 부족 단위의 체계를 가지게 되었고, 철기시대를 맞으면서부터는 연맹국가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것이 마침내는 왕권을 확립한 고대국가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에 많은 이야기도 쌓이게 되고 정감이 노래로 화한 것도 많았을 것이다. 이 중에는 특히 지방 촌장이나 부족장의 이야기들이 시조설화로 남기도 하고, 제전 때 불렸던 노래가 시가로 승화하기도 하였다. 이른바 이것들이 민족의 고유소(固有素)를 간직한 값진 문학유산들이다.

그러나 국가의 규모가 커지고 강력한 왕권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선진문물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기록을 위한 문자라는 도구가 없다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었다. 그들 국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역사를 기술하여야 하고, 비(碑)를 세워야 하고, 국제간에 외교문서가 작성되어야 하며, 군신간에 의사를 교환하자면 문자가 필요하였다. 여기에서 불가피하게 한자와 한문을 수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강력한 왕권체제의 유지를 위하여 사상적 논리체계가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전래의 무격사상(巫覡思想)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는 왕권을 중시한 중앙집권으로 결속하기에는 부적당한 것이었다. 이에 왕즉불(王卽佛)을 표방한 불교를 도입해서 새로운 사상체계를 수립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사실은 문학세계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첫째, 불교의 설화문학과 시가를 낳게 하여 문학을 한층 세련되도록 하였다. ≪삼국유사≫ 등에 나타난 설화나 향가가 그 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불경 등이 주석되고 교리가 보급됨에 따라 문학사상이 심화되고 문장이 세련되어졌다는 사실이다. 특히 비문 등에서 그러한 명문장을 대할 수 있다.

다음으로 한국 한문학에 변이를 가져오게 하였던 요인으로 유교의 이입을 들 수 있다. 특히 신라 중대는 유교정치사상을 표방한 시기였다. 그들의 교육내용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강수(强首)의 이야기에서 밝혀지는데, ≪효경 孝經≫·≪곡례 曲禮≫·≪이아 爾雅≫·≪문선 文選≫ 등으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문선≫은 주목할 만한 것으로, 한문학의 양식을 39가지로 질서정연하게 안배하여 후대의 문학수업에 뚜렷한 전범이 되었다.

당시의 문사들도 이 책을 통하여 한문학의 틀을 이해하고, 또 모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대의 한문학이 정제된 틀을 갖춘 문집을 생산할 만한 수준은 못 되었던 것 같다. 이는 신라 말기의 최치원(崔致遠)에서나 기대될 일이었다. 그러나 중대에 유가경전과 ≪문선≫이 존중됨으로써 비문 등에 부각된 문장의 투가 훨씬 세련되게 나타났음을 볼 수 있다.

상고시대 한문학 중에서 꽃을 피운 시기는 신라 하대였다. 그것은 왕실의 붕괴와 육두품(六頭品) 출신의 진출과 관계가 있다. 이들 육두품의 출현으로 한문학의 저변이 확대되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이들 중의 상당수가 당나라에 유학하여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기에 중국의 한문학을 빠른 속도로 수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 이전에 <여수장우중문시 與隋將于仲文詩>나 <태평송 太平頌>, 그리고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 속에 4수의 시가 있지만 이들은 거의 실용성, 즉 정치적 소용에 의하여 생산된 것이 대부분이었고, 본격적인 한시의 발달은 두드러지지 못하였다.

이에 비하여 하대에 이르게 되면 오언·칠언 같은 금체시(今體詩)에까지 한시가 보편화되기에 이른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육두품 출신들이 문학활동의 주체세력으로 성장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 중에서도 특히 최치원의 업적은 특기할 만하다. 우선 한문학양식을 고루 갖춘 ‘문집’을 최초로 출현시켰다는 점이 큰 공로로 인정된다. 그의 저작인 ≪계원필경 桂苑筆耕≫의 자서에는 ≪계원필경≫ 1부 20권, ≪중산복궤집 中山覆簣集≫ 5권, 사시금체부(私試今體賦) 5수 1권(五首一卷), 57언 금체시(五七言今體詩) 100수 1권(百首一卷), 잡시부 30수 1권 등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 20권뿐이다. 최치원 이전까지의 한문학 유산을 정리해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삼국시대 각 국가별 한문학의 유산을 살펴보면 고구려의 경우, 한시체의 시가로 유리왕의 <황조가 黃鳥歌>,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가 있다.

신라의 경우는 여러 편의 향가를 제외한 한시체의 시가로 가락국의 <구지가 龜旨歌>와 진평왕 때의 <비형사 鼻荊詞>가 있고, 그 밖에 진덕여왕의 작품으로 되어 있는 <태평송>과 원효(元曉)의 <몰부가 沒斧歌> 등이 있다. 백제는 실제로 남아 있는 작품이 없고 향곡(鄕曲)으로 6편의 곡명만 전할 뿐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와서는 설요(薛瑤)의 작품이라는 <반속요 返俗謠>가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고, 설화계의 작품으로는 설총(薛聰)의 <화왕계 花王戒>가 전한다. 그리고 최치원이 남긴 많은 시편과 산문들 중에서 <격황소서 檄黃巢書>가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그 밖에 지증왕 때의 신하인 김후직(金后稷)의 <간렵문 諫獵文>도 한문학의 시대현실을 잘 반영해 주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문학적인 성격에서 다소 벗어나 있는 것들로서, 원효의 <법화경종요서 法華經宗要序>와 같은 많은 불교문자들이 생산되었고, 그와 더불어 보조선사창성탑비문(普照禪師彰聖塔碑文) 등 비문도 여러 편 남아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무렵에 정치적으로 필요했던 외교문자로 문무왕의 <답설인귀서 答薛仁貴書>와 같은 편지글, 통일신라 말기에 최승우(崔承祐)의 <대견훤기고려왕서 代甄萱寄高麗王書>도 보인다. 그런데 이 시기에 있어서 안타까운 사실은 중요한 작품들이 상당수 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 花郎世紀≫가 그 좋은 예라 하겠다.

이상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상고시대의 문학은 소·서·표·비명 등 정치현실과 결부된 글들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이것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실용문이지 현대개념의 문학의식에서 출발한 글들은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신라 하대로 내려오면서 당나라에 유학갔던 학생들에 의하여 문학의식의 성장을 목격할 수 있는 본격적인 한시문학이 꽃피기 시작했다. 요컨대, 상고시대라는 긴 세월은 한국 한문학의 준비기라는 데 의의가 있다.

고려시대의 한문학

고려시대는 정치사적으로 크게 4기로 나누어 특징지을 수 있다.

제1기는 현종대까지 약 120년간이다. 이 기간의 정치담당층은 신라 말기의 육두품 출신과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지방호족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치체제를 보면, 건국 초기에는 호족연합정권 성격이 짙었으나, 광종과 성종을 고비로 중앙집권체제로 개혁이 적극 추진되어 현종 때 마무리되었다.

이 동안에 여러 가지 소용돌이가 있었지만 이 중에서도 인재등용방식인 과거제도의 추진과 학교의 설립 등이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더구나 고려 한문학의 융성이라는 측면에서 고무적인 시기였다고 할 것이다.

제2기는 무신정권이 설 때까지의 70년간으로 이 시기는 비교적 화평했을 뿐만 아니라 역대의 왕들이 직접 문학에 참여하고 문사들을 애호했던 관계로 문운(文運)이 크게 융성했던 시기였다.

제3기는 권신과 무신이 권력을 독점했던 약 150년간이다. 더구나 외침과 내란으로 국정에 소요가 가장 많았고, 문사들이 호된 시련을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인들의 횡포로 많은 문사들이 죽고 수난을 당한 것은 사실이나, 살아남은 문인들은 색다른 현실체험을 할 수 있었고, 또 산간에 묻혀 문학에만 전념할 수 있었으므로 전대에 볼 수 없었던 밀도 있는 작품들이 생산되었다. 그와 더불어 문학양식의 측면에서도 다채로운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제4기는 무신정권이 끝나고 난 뒤 약 1세기 동안을 지칭한다. 이때는 이미 국기(國紀)가 해이해지고 원나라의 노골적인 간섭으로 자주성이 상실되어 가던 때였다. 그러나 고려 말엽에 오게 되면 성리학의 수입에 따른 신진사대부 계층이 출현하여 새로운 내용의 한문학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끝내 고려는 멸망하고 말지만 성리학을 토대로 한 학풍의 진작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개화, 결실할 수 있도록 바탕을 구축했던 것이다.

그러면 위에서 언급한 개괄적인 논의를 염두에 두면서 그 동안 어떤 문사들이 어떠한 작품을 남겼는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사≫ 홍유조(洪儒條)를 보면 홍유의 수는 480명에 달하는데, 이들이 고려사회를 지도해 나갔던 계층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작품을 남긴 문장가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자료가 불완전하지만 현존하는 자료를 통하여 검토해 보면 몇 편의 작품을 썼던 사람까지 합쳐 보아야 190여 명 정도에 불과하다.

최해(崔瀣)의 <동인문서 東人文序>와 최자(崔滋)의 <보한집서 補閑集序>, 그리고 서거정(徐居正)의 ≪동인시화 東人詩話≫·≪동문선≫ 등에 열거된 인물들은 대개가 문사이거나 승려들이 중심이 된다.

이 시기에 생산된 문집의 실상을 살펴볼 때, 비교적 문집 본래의 체재와 내용을 온전히 갖춘 것으로는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과 이곡(李穀)의 ≪가정집 稼亭集≫, 그리고 이제현(李齊賢)의 ≪익재집 益齋集≫ 정도이다.

그리고 문집의 형태로 현재 전해오는 것들은 조선시대에 후손들에 의하여 수집, 정리되어 단편적으로 구성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것들은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편집, 간행한 ≪고려명현집 高麗名賢集≫에 대부분 수록되어 있다.

그 밖에 문집의 이름만 전할 뿐 누대에 걸친 전란으로 소실되거나 인멸된 것들도 수십 종에 이른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김극기(金克己)의 ≪김거사집 金居士集≫과 이인로의 ≪쌍명재집 雙明齋集≫이다.

이와 같은 문집들의 서문이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어 그 체재와 성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고려는 호국불교가 성행되던 시기였으므로 고승들의 문집 간행도 있었을 것이나, 현전하는 것은 의천(義天)의 ≪대각국사문집 大覺國師文集≫과 같은 몇 종뿐이다.

다음으로 고려시대 문학이 가지는 배경적 특성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문풍(文風)이다. 고려 건국의 성격이 지방의 호족과 신라 육두품 계열이 중심이 되었으므로 신라의 제도를 당분간 그대로 수용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신라 말기의 문사들도 그대로 창작활동을 지속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들 문사들도 만당시대(晩唐時代)의 유학생들이었으므로 만당의 문풍에 영향받아 그것을 재현하게 된다. 시풍이 그렇고 문체에 있어서도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이 그렇다. 적어도 광종 이후까지는 이 문풍이 지속된 듯하다. 그러다가 당송풍이 중기를 넘어서면서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소동파(蘇東坡)를 추종하는 열기는 대단하였다.

둘째, 과거식문(科擧式文)과 순문학의 관계이다. 광종대에 인재등용방식으로 실시된 과거제도에는 명경과와 진사과가 있었다. 전자는 ≪역≫·≪서≫·≪시≫·≪춘추≫라는 경서로써 시취(試取)하였고, 후자는 의(疑)·의(義)·시·부·표·책·논·잠·명·송 등 전통적인 한문학 양식으로 시취하였다. 이 중에서도 진사과에 많은 비중이 주어지자, 종래의 ≪문선≫ 중심의 문학경향을 탈피한 창작문학이 발달되어 많은 문사들을 배출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폐습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식의 문장이란 개성이 발현된 순문학이 아니고 시인 경우에는 공령시(功令詩)요, 산문인 경우에는 과문육체(科文六體)라 하여 일정한 공식에 고사를 대입하는 등의 형식놀음이었다. 그래서 ‘배우지설(俳優之說)’이라 하여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생활 방편으로 과거에 응시는 하였지만 종국에 가서는 그러한 경지를 탈피하여 순문학으로 복귀하는 것이 고려 문사들의 기본태도였다. 이는 그들이 불후의 문학이야말로 돈이나 벼슬을 능가하는 것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중기 이후의 문사들은 개성적인 문학세계를 개척하여 한문학의 깊이를 한층 심화시켜 갔던 것이다.

셋째, 새로운 문학양식을 들 수 있다. 최치원의 문집에서 이미 다채로운 문학양식이 안배되어 있음을 볼 수 있지만, 고려에 와서 사(辭)·부(賦)와 비평양식이 등장하고 설화문학이 전개되며 가전체문학(假傳體文學)이 창작되고 있음을 들 수 있다. 사·부는 과거시험에 부과되었던 관계로 그 발달이 촉진되었다 할 것이다.

김부식의 <아계부 啞鷄賦>·<중니봉부 仲尼鳳賦>, 이규보의 <몽비부 蒙悲賦>·<방선부 放蟬賦>·<조강부 祖江賦>, 그리고 이인로의 <옥당백부 玉堂栢賦>·<홍도정부 紅桃井賦>, 최자의 <삼도부 三都賦>, 이색(李穡)의 <관어대소부 觀魚臺小賦> 등을 손꼽을 수 있다.

다음은 비평의 등장이다. 이규보의 ≪백운소설 白雲小說≫, 이인로의 ≪파한집 破閑集≫, 최자의 ≪보한집 補閑集≫, 이제현의 ≪역옹패설 櫟翁稗說≫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송대의 비평방식을 도입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을까, 시란 무엇이냐 하는 새로운 문제의식에서 빚어진 것이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본격적인 비평문학으로 볼 수 있는 점보다는 시화나 잡록의 성격을 짙게 풍기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 제시했던 저서들은 모두 시를 문제의 대상으로 다룸으로써 한국비평문학을 열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다음은 설화문학과 가전체를 들 수 있다. 이것들은 기본적으로 사전류(史傳類)에 드는 양식들이다. 사전에 대한 의식은 이미 삼국시대에도 있었지만 이를 좀더 구체화해서 ≪삼국사기≫가 나오고 ≪삼국유사≫가 나온 것은 한국문학사상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으며, 가전체의 출현은 기교나 의인적 수법의 가능성을 새롭게 제시해 주었다.

넷째, 문학사상적인 측면에서의 불교와 유교의 심화를 들 수 있다. 먼저 불교적인 측면에서 보면, 의천·원감(圓鑑)·나옹(懶翁)·보우(普雨) 외 수많은 시승(詩僧)들의 배출도 괄목할 만한 것이지만, 지눌(知訥)·혜심(慧諶)·나옹·보우 등으로 이어지는 선종(禪宗)의 심법(心法)은 고려문학사상을 깊이 있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유교의 경우도 재도적(載道的) 문학의 태동을 보게 하였고, 유가 경전이 가지고 있는 사상이나 이야기들이 문학의 기층에까지 파고들어와 내용이 더욱 깊이를 가지게 하였다. 특히, 고려 말에 대두된 성리학은 후대의 도학적 문학세계를 형성하는 데 근간이 되고 있다. 한마디로 고려기는 충실하게 한문학의 골격을 정비하고 그 기초를 다지고 익혀서 기틀을 완성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한문학

신라의 국가체제는 골품제로, 고려는 귀족국가로 각기 특징지을 수 있다면 조선은 양반관료국가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의 통치체제는 15세기에 일단 완성되고 16, 17세기에 이르게 되면 붕당(朋黨) 또는 공론정치로 발전하게 된다.

다시 18세기에 오면 억눌려 왔던 민중들의 의식이 고양됨으로써 양반관료체제는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이어서 서구문물이 유입됨에 따라 19세기에는 이른바 근대화라는 복잡한 물결 속에 빠져 들어가게 되어 한문학이 퇴색일로를 걷게 된다. 이렇게 500년 세월 동안 발전해 온 한문학을 몇 단계로 구분하여 그 개략적인 특징들을 언급하기로 한다.

첫째, 건국 초에서부터 15세기까지는 조선시대 한문학의 정비기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정치가 주자학을 이념체계의 핵심으로 하여 체제정비를 논리화했던 것처럼, 문학도 재도지문(載道之文)으로써 이론적 체계를 수립한 것이다.

둘째, 16세기는 붕당정치가 발전하던 시기로 사화(士禍)와 같은 몇 차례의 파국을 경험하게 된다. 이에 따라 선비들은 산림 속으로 은거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어 학문의 취향도 사변적이요 형이상학적인 방향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문학 역시 심성 도야나 법자연(法自然)의 경지를 서정화한 내용들이 많아진다.

셋째, 17세기로 접어들면 16세기의 관념적 문학세계가 비판되고 자아의 각성과 실증성이 고조되어 정감적이고도 개성적인 문학관이 대두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란을 겪고 난 뒤의 자성론(自省論)의 문학적 발로라 하겠다.

넷째, 18, 19세기는 17세기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현실인식이 보다 강화되고 있다. 이른바 실학운동이 그것이다. 종래의 학문체계를 철저하게 비판하고 현실을 고발하며 사소한 사물에서까지도 이용후생을 도모했다.

이러한 사상은 다시 근대를 지향하면서 발전해 갔지만 결국은 국권의 상실과 함께 한문학의 운명도 다하게 되고 서구문학의 이입에 따라 주도적 자리를 그에게 넘겨주고 만다.

이와 같은 큰 흐름을 겪으면서 5세기에 걸친 조선시대의 한문학은 그 어느 시대에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많은 문학유산을 남기게 되었다. 현재 각종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의 수가 1만8000여 종에 이르고 있는데, 앞에서 언급한 삼국·고려의 미미한 저작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조선시대에 양산된 것이다. 조선시대 한문학의 발달배경이나 성격 등에 관하여 간략하게 언급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풍(詩風)이다. 흔히 당시풍(唐詩風)이니 송시풍(宋詩風)이니 하여 시풍을 논하는 것이 당대의 경향이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시대별로 구획해서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같은 시대라 할지라도 작자의 기호에 따라서 취향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작이란 그 사람의 재능이나 영감에 따라서 우열이 결정되는 것이지 어느 시풍을 따르고 있느냐가 평가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시대풍조는 대체로 고려 중기에서 조선시대 선조대까지는 송풍이 유행했다고 하면, 그 뒤부터는 성당(盛唐)의 두보(杜甫)나 이백(李白)의 시풍이 우세하였다 할 수 있다.

선조 때의 문신인 심수경(沈守慶)도 ≪견한잡록 遣閑雜錄≫에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선비로서 옛시를 공부하는 자들이 모두 한퇴지(韓退之)와 소동파를 읽었다. 그러던 것이 근년에는 선비들이 한·소는 격이 낮다고 읽지 않고 이백과 두보의 것을 취하여 읽는다.”라고 한 것이 있다.

이는 선조대에 시풍이 바뀌어 가고 있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송시풍으로 가장 명성이 높았던 시인으로는 성종·명종 연간의 박은(朴誾)·이행(李荇)·정사룡(鄭士龍)·노수신(盧守愼)·박상(朴祥)·신광한(申光漢)·성현(成俔)·황정욱(黃廷彧)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선조 이후에 성당시법으로 이름난 사람으로는 최경창(崔慶昌)·이달(李達)·백광훈(白光勳)으로, 이들을 세칭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한다.

둘째, 문학사상의 배경으로서 유교와 불교와의 관계이다. 조선조의 정치이념은 유교를 표방했기에 문학도 유교를 기반으로 발전해 갔던 점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불교의 배척을 위한 이론이 정립되었다는 사실이다.

정도전(鄭道傳)의 <불씨잡변 佛氏雜辨>과 <심기리편 心氣理篇>이 그것인데, 이는 권근(權近)·변계량(卞季良)·신숙주(申叔舟)·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이개(李塏)·김수온(金守溫)·강희맹(姜希孟) 등의 합세로 더욱 강조되어 유교적 문학론을 체계화하는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즉, 삼재론적(三才論的)인 체계 속에서 문학을 관도(貫道) 내지 재도적(載道的) 측면에서 이해하도록 하는 이론이었다.

이에 맞서서 기화(己和)는 ≪현정론 顯正論≫을 저술하여 유가들의 편견을 공박하고 불교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하지만 유교가 시대의 한 큰 흐름이고 보면 조선시대 500년은 그 흐름이 주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분명한 것은 비록 <불씨잡변>이라 하더라도 불교의 근본까지는 비판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정도전이나 기화의 이론에서 상통하는 것은 불교든 유교든 그 근본은 일치한다는 견해인 것이다. 다만 그것의 형이하학적 측면이나 운영의 측면에서 공박이 오간 것뿐이다. 따라서 불교와 유교는 끝까지 그 뿌리만은 건재할 수 있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기에 유교나 불교의 조화론은 끈질기게 이어졌고, 작품세계 안에서도 그러한 요소들이 자주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유불도의 합일론’은 유명한 것이지만, 묵암(默菴)·연담(蓮潭)·인악(仁岳)·침굉(枕肱) 등의 명승들은 오히려 허심탄회하게 유교까지 연구하였고, 거꾸로 노수신은 거유(巨儒)이면서도 ‘유불양교의 이동설(異同說)’을 주장하여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요컨대, 표면상의 물결과는 달리 우리 나라 사상이나 문학세계의 근저에는 어쩔 수 없이 유불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 밖에 노장사상(老莊思想)이 문학세계에 끼친 영향도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동양의 대자연의식(對自然意識) 안에는 항상 노장적인 무위사상(無爲思想)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산수자연을 노래한 허다한 시가들에서 이러한 자연관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셋째, 도학(道學)과 사장(詞章) 간의 문제이다. 도학과 사장의 대립과 논쟁은 고려시대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나, 조선시대에 있어서는 고려 말기의 정권교체를 둘러싼 의견대립과정이 그 연원이 된다.

즉, 안유(安裕)를 시작으로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 등이 도학 쪽에 속한다면, 이색·이숭인(李崇仁)·권근 등은 사장 쪽에 가깝다. 양쪽 다 유가선비들인 점은 사실이나 문학을 경시하느냐 옹호하느냐 하는 차이에서 그렇게 불리고 있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유가들은 대체로 문학을 옹호한 쪽에 속했기 때문에 재도를 바탕으로 한 문학론이 성립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성종대에 이르러 도학과 사장이 서로 충돌하게 되는데, 그 진원은 김종직(金宗直)의 문도(門徒)에서 찾을 수 있다. 이학(理學)을 주로 공부했던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과 사장을 주로 하였던 김일손(金馹孫)·남곤(南袞)·남효온(南孝溫)·조위(曺偉) 등의 대립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때만 하여도 사장 쪽이 우세하였다. 그러다가 김굉필의 제자인 조광조(趙光祖)가 등장하면서 양자간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수차례에 걸친 사화의 결과 선비들이 상당수 희생되고 사회의 기강이 크게 흔들리게 되자 중종은 성리학의 진흥을 통하여 사회질서를 확립하려 하였다. 이에 사장을 억누르고 경학을 존중하게 되자 재야에 있는 도학자를 중용하기에 이른다.

이때 조광조가 등용되어 중종의 의도대로 치군택민(治君澤民)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실천하기 위하여 사장학을 배격하기를, 사장은 위학(僞學)이요 사장을 하는 사람은 부화경박(浮華輕薄)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윽고 왕에게까지 시부를 짓지 말도록 하고, 신하들이 시를 지어 올리는 것조차 금하게 하였다. 여기에 동조한 인물들이 바로 김정국(金正國)·김정(金淨)·김구(金絿)·윤자임(尹自任) 등이다.

이와 같은 도학파들의 움직임은 기존의 사장파들에게 커다란 위협을 느끼게 하였고 급기야는 남곤 일파가 반기를 들고 나서게 되니, 그 반론은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사대교린(事大交隣)에 시가 절대 필요하다는 실용성, 둘째 사장과 경학은 하나이니 둘 중에서 하나를 편벽되게 폐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조광조의 강경론에 비해서는 다소 온건한 논조이다.

유학은 범할 수 없는 정치이념이자 당시 식자 계층으로서는 부동의 문학사상의 배경이었으며, 또 조광조가 시부 폐지를 주장했다고 해서 쉽사리 시부가 자취를 감출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성리학의 수준향상으로 인하여 시의 세계가 더 각성된 모습을 띨 수 있었고 심화된 내용의 시가 나타날 수 있었다. 도학 계열의 시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넷째, 산림문학(山林文學)과 사실주의문학을 거론할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이나 유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문학에도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즉, 관념론적 사유에 바탕을 둔 것과 경국(經國)에 바탕을 두는 것이 그것이다.

16세기 성리학자로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이이(李珥) 등은 서로간에 다소의 차이는 발견되지만 모두가 사변적인 관념시를 쓴 것은 동일하다. 이러한 종류의 시들은 한없이 깊고 본원적인 아름다움을 창조했다는 데 특징이 있다.

이에 비해서 사회현실을 중시하여 사실주의적 경향에 가까운 시를 쓴 사람도 있게 되었으니, 그 좋은 예로 실학시대 인물 중의 하나인 정약용(丁若鏞) 같은 이를 들 수 있다.

물론 두 유형을 두고 우열을 논할 수 없으나 사변적인 시가 깊이를 다져 준다면, 사실주의적인 시는 그 폭을 확장시켜 준다는 데 각기 장점이 있다. 결국 인류문화란 사유의 깊이와 현실인식의 폭, 이 양자가 조화되어 발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면, 서경덕 계열의 시인이 없어서도 안되고 정약용 계열의 시인 역시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섯째, 문학양식의 발전이 어떠했는가 하는 점이다. 시대가 내려올수록 모든 문학이 발전한다는 것은 정한 이치이겠지만, 조선시대 한문학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현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소설의 출현과 비평 및 악부의 발달이다.

먼저 소설은 종래 한문문집에서 보인 전지류와 역사서에서 나타나는 열전과 확연한 구분을 짓기가 매우 어렵다. 다만 소설은 전지류나 열전에 비하여 부연과 과장과 웃음이 동원되어 이야기로서의 흥미가 한층 고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는 작자의 상상력이 동원되어 다소간의 허구성과 결구를 맺는 특이한 기법 등이 가미되어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작품을 예로 들자면, 우선 조선 초기에 양산되고 있는 골계류(滑稽類)의 재미있는 이야기로서, 강희안(姜希顔)의 ≪촌담해이 村談解頤≫와 서거정의 ≪골계전 滑稽傳≫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서사적 결구를 갖추고 있는 초기적 작품으로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 金鰲新話≫가 있다.

몽유록(夢遊錄) 계열의 작품으로 심의(沈義)의 <대관재몽유록 大觀齋夢遊錄>과 임제(林悌)의 <원생몽유록 元生夢遊錄>이 있다. 또한, 임제의 작품으로 의인화 수법이 사용된 <화사 花史>와 <수성지 愁城誌>가 있으니 고려시대의 가전체문학이 여기서 다시 재현되고 있음을 본다.

중기에 오게 되면 대부분 전(傳) 계열의 한문소설이 생산되고 있는바, 허균(許筠)의 <남궁선생전 南宮先生傳>을 비롯, 몇 편의 전이 있고, 그 밖에 정태제(鄭泰齊)의 <천군연의 天君衍義>와 조성기(趙聖期)의 <창선감의록 彰善感義錄> 등도 유교적 교훈을 바탕으로 창작된 중요한 작품들이다.

그러다가 후기에 이르게 되면 실학의 거목인 박지원(朴趾源)에 의해 새로운 차원의 한문소설이 창작된다. 그는 <허생전 許生傳>·<양반전 兩班傳> 등과 같은 조선 후기의 세태를 풍자적으로 묘사한 우수한 작품들을 창작해 내고 있다.

다음은 비평 분야이다. 한문학 양식 중에서 자유로운 형식의 하나가 바로 비평 혹은 만록(漫錄)이다. 이것은 까다로운 격식에 구애받지 않으면서도 역사서술의 규범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즉, 무형식을 요구하는 형식이라 하겠으니, 고려 중기나 말기에도 몇몇 문인들에 의하여 관심표명이 있었지만 조선시대에 보는 것과 같이 활발하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문학비평만을 전문적으로 다룬 것도 있으며, 그 밖의 견문을 붓 가는 대로 담아낸 이른바 만록류도 있다. 만록류에는 문학비평이나 인물비평 혹은 역사비평 등이 혼합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그 중요한 저작들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초기의 비평은 서거정의 ≪동인시화≫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으니, 이는 곧 전조(前朝)의 문학유산에 대한 비평을 주로 하고 있는 순수비평서라 할 수 있다. 중기에는 허균의 ≪성수시화 惺叟詩話≫가, 그리고 후기에는 홍만종(洪萬宗)의 ≪소화시평 小華詩評≫이 각각 제대로 정리된 비평서라 하겠다.

그리고 만록 내지는 잡기류의 저작으로 ≪대동야승 大東野乘≫이나 ≪패림 稗林≫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수십 종을 헤아린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초기에는 서거정의 ≪필원잡기 筆苑雜記≫나 성현의 ≪용재총화 慵齋叢話≫가 있고, 중기에는 권응인(權應仁)의 ≪송계만록 松溪漫錄≫과 그보다 조금 뒤에 나온 김만중(金萬重)의 ≪서포만필 西浦漫筆≫ 등이 있으며, 후기에서 한말에 걸쳐 상당한 수효의 만록·잡기류가 계속 쓰여졌으니 황현(黃玹)의 ≪매천야록 梅泉野錄≫을 손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밖에도 백과전서적인 저서들도 많이 나와 문학과 관계되는 것을 포함하여 사회 전반의 문제를 정리해 놓고 있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 芝峰類說≫이나 이익(李瀷)의 ≪성호사설 星湖僿說≫이 이에 해당된다.

또한 만록이나 잡기류와 그 성격이 꼭 일치하지는 않지만 수필문학이라 부를 수 있는 것으로 견문록과 같은 기행문도 소홀히 다룰 수 없다. 중국이나 일본에 외교사절을 수행하고 돌아온 경험을 기록으로 남긴 글 중에는 문학적으로 우수한 것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해행총재 海行摠載≫나 ≪연행록선집 燕行錄選集≫ 등에 수록되어 있다.

다음은 악부의 발달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악부가 크게 발달하지 못하다가 후기에 와서 얼마간의 성과를 거둘 수 있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이제현이 속가(俗歌)를 칠언으로 한역하여 소악부(小樂府)라 하였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해동악부(海東樂府)라는 명칭까지 출현하면서 우리의 역사와 풍습을 담은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생산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김종직의 <동도악부 東都樂府>, 심광세(沈光世)의 <해동악부>, 이익의 <성호악부 星湖樂府>, 정약용의 <탐진악부 耽津樂府>, 이학규(李學逵)의 <영남악부 嶺南樂府>, 그리고 김려(金鑢)의 <사유악부 思牖樂府>등이 있다. 이러한 악부들은 일반적인 한시가 개인의 서정세계를 추구하는 데 비해 우리 나라의 역사·풍물 등 한국적 정서를 노래한 점에 가치가 있다.

한문학 연구사

민족주의의 한계

1930년대는 이른바 조선학(朝鮮學, 뒷날의 국학, 한국학)의 정립을 위한 노력이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이다. 그러나 그 성격은 구성 인자(因子)의 이질성 때문에 서로 다른 얼굴로 나타난다.

이른바 구민족주의자(舊民族主義者)들이 직접 조선의 ‘혼’을 찾아 나선 일군의 선각들을 먼저 들 수 있다. 1910∼20년대의 연장으로, 이념이나 사상과 같은 정신쪽에 전적으로 기울어 학문으로서의 문학을 넘보지 못한 경우이다.

김원근(金瑗根)의 <조선고금시화 朝鮮古今詩話>(靑年 2권 5∼7, 1922), <조선시사 朝鮮詩史>(新生 17∼60, 1930∼34), 현상윤(玄相允)의 <조선문학과 김농암(金農岩)>(三千里, 1936), 안재홍(安在鴻)의 <다산(茶山)의 사상과 문학>(三千里, 1936) 등이 모두 문학을 표방한 저술들이지만, 이것들은 처음부터 과학으로서의 문학연구에까지는 미치지 못한 것들이다.

다음은 천태산인(天台山人)이 그 대표격이다. 그의 저술 가운데서도 ≪조선한문학사 朝鮮漢文學史≫는 우선 우리 나라 한문학을 통시적으로 종관(綜觀)하고 있는 것이어서 방법론적으로 근대적인 학문에 근접하고 있는 증거를 일찍이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것은 식민지 제국대학(帝國大學)에서 서구를 간접체험한 초기 성과이므로 관심거리가 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저자 스스로 한문학은 지배계급의 잠꼬대가 아니면 풍월타령(風月打令)이었기 때문에 일반 민중의 생활을 엿볼 만한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조선한문학사를 엮는 일이야말로 구 시대의 골동품을 수집, 정리하는 작업에 불과한 것이라 했다. 그러므로 그의 ≪조선한문학사≫의 방법론이 문예사회학이나 마르크스주의적인 방법론에 의거한 것으로 오해할 만한 흔적은 이때까지도 찾아보기 어렵다.

다음은 이인영(李仁榮), 손진태(孫晋泰) 등에 앞장선 이른바 신민족주의자들의 등장을 들 수 있다. 이때 조운제(趙潤濟)는 스스로 신민족주의를 밖으로 외치지는 않았지만, 이인영, 손진태 등이 가세하면서 나름대로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 이 시기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러나 그의 포부를 이룩한 것은 시가문학(詩歌文學)이며, 그에게 있어서 한문학은 처음부터 엄두도 내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한문학의 수용문제에 대하여 절충론을 표방하였으며, 그의 ≪국문학사≫에서 수용한 한문학은 소설이나 수필같은 이른바 연문학(軟文學)에 한정하여 선택적으로 받아들인 것들일 뿐이다. 이로부터 한문학 연구는 한문학의 정통, 즉 시화 문은 배제하고 여사(餘事)의 것들만 수습(收拾)하는 것으로 절충한 결과가 되었다.

사상 연구의 바람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한문학 연구도 논문의 형식을 갖추면서 학술지에 발표되기 시작한다. 옛날 글방식으로 한문을 익힌 세대와 신학문을 하는 여가에 한문을 공부한 세대가 공존하면서 한문학 분야도 이때부터 본격적인 연구를 기도(企圖)하는 노력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대체로 후자들에 의하여 소설이나 수필과 같이 읽기에 편한 연문학(軟文學)의 해석에 열을 올리면서, 소설이 소설로 파악되지 않고 문학이 사상연구의 시녀(侍女)로 봉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실학(實學)이 무엇인지 개념을 규정하는 서두름도 없이, 한 시대의 현실타개책에 지나지 않는 실학을 검증하는 일이 문학연구의 인기종목처럼 착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한문학 연구는 소설 분야에서 한 시기를 구획하는 듯했다. 박지원(朴趾源)을 비롯하여 김시습(金時習), 임제(林悌) 등의 저작에 대한 연구 성과가 경쟁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풍요를 누리었다. 개별작품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하여 작가의 사상연구에 이르기까지 소설연구에 제공될 수 있는 방법들이 대부분 망라되었다.

그러나 초기 단계에서부터 사상성이 강조된 이 방면의 연구성과는, 특히 연암의 경우, 문학 연구의 바깥에서 고조되기 시작한 실학사상연구의 상승 기류가 연암 문학 연구에 열기를 더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외재적(外在的) 요인이 연암소설의 본격적인 연구를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러나 소설작품의 연구가 소재론적(素材論的) 접근의 한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거나, 사상연구와 같은 주변탐색에서 머뭇거려야만 한다면, 거기에는 방법론의 부재(不在)현상보다 더 심각한 작품 자체의 근본적인 성격에 문제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도 초기 연구에서 겪어야만 했던 미로(迷路)는 개척되지 않았다. 문학연구의 바깥에서 고조되기 시작한 실학사상 연구의 ‘바람’은 연암소설의 연구방향을 더욱 혼미하게 하였을 뿐이다. 이 시기의 업적을 집약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이가원(李家源)의 ≪연암소설연구 燕岩小說硏究≫이다.

전통적인 해석적 방법론이 지속되는 분위기 속에서도 종래의 연구방법에 대한 회의와 자기 성찰을 통하여 새로운 방법론의 모색을 위한 진통을 겪어야만 했던 것이 1970년대 연암 연구의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난다. 전시기에서 보여 주었던 ‘감격’이나 ‘정열’이 안정을 되찾으면서 그 연구성과도 격감세를 보였다.

그러나 새로운 방법론이 모색되는 진통과정에서 흔히 있기 쉬운 또 다른 위험성도 결코 배제될 수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비평이론의 시험이나 비체질화한 논리의 전개과정에서 야기되는 논리의 비약이 그 파탄에 이르고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은 또 다른 차원에서 연구 풍토를 곤혹케 할 소지가 있다.

매월당(每月堂)의 ≪금오신화≫와 임제(林悌)의 작품들은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전기(傳奇)의 한계 때문에 연구성과에 있어서도 양적인 열세를 면치 못했다.

≪금오신화 金鰲神話≫에 대한 연구는 1950년대 후반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기의 전기(傳記)적 연구에서부터 ≪전등신화 剪燈神話≫와의 비교연구에 이르기까지 문헌학적 연구로 시종하였으나, 이러한 방법론에 의한 연구는 정주동(鄭鉒東)의 ≪매월당 김시습연구 梅月堂金時習硏究≫(1965)에서 결산을 보았다.

시론 연구의 의미

한시에 접근하는 간접체험의 방법 가운데는 시론(詩論)과 같은 비평이론의 연구가 있다. 1960년대 초기부터 시도된 이 방법론은 본격적인 이론서가 태무(殆無)한 우리 나라 비평사의 현실에서 보면, 처음부터 그 한계가 예료(豫料)되는 것이지만, 이에 대한 노력은 197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정력적으로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 이룩된 이 방면의 성과는, 대체로 우리 나라의 시론을 중국 이론의 포괄적인 이식현상(移植現象)으로 치부해 버리거나, 아니면 안이한 자료사적 사실 확인에서 그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중국 시론의 한국적 전개과정에서 제시된 의미들을 읽지 못한 아쉬움은 그대로 남겼다. 특히 성리학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과민한 나머지 시론의 현실문맥을 사실대로 파악하지 못한 미진(未盡)은 재고하는 수고가 있어야 했다.

한시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이 사실상 어렵게 된 현실에서는 시론에 대한 연구가 한시에 접근할 수 있는 간접체험의 방법으로서 가장 안이한 것이 될 수 있으며, 우리 나라와 같이 비평사의 자료가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집중적인 연구성과의 실현도 다른 분야에 비하여 용이했을 것이다.

1960년대 초기부터 비롯된 시론의 연구는 197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지속되어 개별 시론에 대한 연구는 마무리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시론서가 없다시피 한 우리 나라 현실에서 시화나 잡록류(雜錄類)에 산재해 있는 단편적인 시론의 수습만으로 시론연구의 작업이 완결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초기 연구에 바쳐진 조종업(趙鍾業)의 연구성과는 일단 기록될 만한 수확이다. 그러나 1960년대의 연구에서 그가 이룩한 것은 대체로 문헌학적 해석에서 그치고 있으며, 사전에 갖추어야 할 이론체계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확인의 과정에 있어서도 체계적인 정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느낌이다. 시론연구의 또 다른 방면에서 많은 성과를 낸 최신호(崔信浩)에 있어서도 이러한 문제는 극복되지 않았다.

1970년대의 업적 중에서 주목되어야 할 것은 ≪한국고전시학사 韓國古典詩學史≫이다. 이것은 전형대(全鎣大)의 ≪여조시학연구 麗朝詩學硏究≫(1974), 정요일(鄭堯一)의 ≪조선전기시학연구 朝鮮前期詩學硏究≫(1977), 최웅(崔雄)의 ≪조선중기시학연구 朝鮮中期詩學硏究≫(1975), 정대림(鄭大林)의 ≪조선후기시학연구 朝鮮後期詩學硏究≫(1978) 등 4편의 석사학위논문을 한데 묶는 것이다. 우선 개별 시학의 연구가 주류를 이루어 온 연구풍토에서 처음으로 통시적인 연구가 이룩되었다는 점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국문학의 사적 연구에서 역사적인 배경설명과 같은 것이 흔하게 기도되는 현상이지만, 일반사의 수준이 국문학과 같은 특수사의 연구에 기여할 만한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을 때, 이러한 노력은 도리어 논문의 성실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

이러한 문제는 이들 논문에서도 배제되지 않았다. 그리고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의 위압을 지나치게 의식함으로써 문학현상의 내적 질서를 읽지 못하고 있는 흠은 이들 논문에서 공통적으로 지적되어야 할 사실이 될 것이다. 관도론(貫道論)이나 재도론(載道論)과 같은 효용론적 문학관 때문에 시론의 현실문맥을 사실대로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런 것에 속한다.

도문일치(道文一致)를 강조한 것이 조선시대 문학이론의 지배원리처럼 생각되어 왔지만, 그러나 겉으로 표방하고 있는 이 효용적인 문학론은 다만 문학론 위에 군림하고 있는 형식적인 구호가 되고 있을 뿐, 실제비평(實際批評)이나 시론의 전개에 있어서는 사실상 극복되고 있는 것을 알아내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병수(閔丙秀)의 <고전시론의 한국적 전개에 대하여>(1979)는 이러한 아쉬움을 간파한 성과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중국의 고전시론을 수용, 전개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우리 나라 초기 시론의 표현론적 전통이 우리 나라 비평이론에 관류하는 이론적 기반이 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 그런 것이다.

한문학 연구의 과제

한문학의 연구는 처음부터 선후가 뒤집어지고 주종(主從)이 뒤바뀐 채 혼미를 거듭해 왔다. 개별작품에 대한 연구성과의 축적도 없이 한문학사가 앞질러 편찬되어야 했던 역조현상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거니와, 시문에 비하면 여기(餘技)에 지나지 않는 한문소설 연구가 시류인 양 군림해 왔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로 지적되어야 할 것은 연구풍토의 향방이다.

소설연구가 사상연구의 시녀 구실로 일관해 온 것과 마찬가지로 시작(詩作)에 대한 연구 역시 ‘의식’과 ‘사상’과 ‘사회’를 작품 속에서 뽑아내는 소재론적 접근을 일삼았을 뿐이다.

이런 경우 대개는 작품세계의 전정(全鼎)은 고려되지 않았으며 극히 선택된 자료에 의존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결과만 가지고 따진다면, 수백 편을 헤아리는 양적인 팽창은 보이면서도 신기(新奇)만 추수(追隨)하는 시대의 속상(俗尙)에서 쉽게 일탈하지 못하고 있는 연구풍토에 더 큰 책임이 지워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한문학의 본령(本領)에 근접하려는 노력은 1950년대 후반에서부터 있어 왔다. 서수생(徐首生)의 초기 업적을 총집한 ≪고려조한문학연구 高麗朝漢文學硏究≫(1971)는 그 방법론을 따지기에 앞서 기록되어야 할 성과이다.

차주환(車柱環)의 <백운사고(白雲詞考)>(1972), 유성준(柳晟俊)의 <신자하시(申紫霞詩)의 특성>(1972) 등은 중국문학 전공쪽에서 거들어 준 보탬이라 할 것이다.

이규대(李圭大)의 <최고운(崔孤雲)의 한시연구>(1975), 박성규(朴性奎)의 <익재한시연구(益齋漢詩硏究)>(1976), 이병혁(李炳赫)의 <고려말기의 한문학 연구>(1977), 민병수(閔丙秀)의 <매월당(梅月堂)의 시세계>(1978), 김성기(金聖基)의 <고려한시연구>(1978), 이동환(李東歡)의 <조선후기 한시에 있어서 민요취향의 대두>(1979), 송준호(宋寯鎬)의 <유득공(柳得恭)의 이십일도회고시연구(二十日都懷古詩硏究)> 등이 한시에 관심을 보인 1970년대 이후 1980년대 중간 업적에서 뽑아낸 것들이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한국한문학연구회(韓國漢文學硏究會:뒤에 한국한문학회로 고침)에 의하여 학회지 ≪한국한문학연구 韓國漢文學硏究≫(1976)가 간행되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를 지나면서 경향 각지의 대학에서 학위논문을 쏟아 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논문들은 이때까지도 ‘사상’과 ‘문학관’을 검색하는 등 작가의 의식 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에 한국한시학회(韓國漢詩學會)(1988)가 출범함에 따라 한국 한시문학이 그 연구연역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1990년대에 접어들어 이 학회에서 전문 한시연구지 ≪한국한시연구 韓國漢詩硏究≫(1993)와, 한국 한시작가의 통시적 연구서라 할 수 있는 ≪한국한시작가연구 韓國漢詩作家硏究≫(1995)를 간행하기 시작하여, 본격적인 한시 연구의 단초를 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때맞추어, 민병수(閔丙秀)에 의하여 우리 학계에서 처음으로 ≪한국한시사 韓國漢詩史≫(1996)가 간행되었으며, 순연(純然)히 우리 나라 시문 자료로만 예증(例證)한 ≪한국한문학개론 韓國漢文學槪論≫이 같은 때에 출간되어 1990년대의 성과로 기록될 수 있었다.

우리 나라 한문학의 우수성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먼저 개별작품에 대한 확인·검증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것들을 현대국어로 번역하고 평주(評註)를 붙이는 작업이 진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우수한 연구논문의 제작을 가능케 하는 전단계적 노력으로서도 소중할 뿐 아니라 단편적인 연구논문의 제작에 못지않게 한시 연구의 천착에 값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종찬(李鍾燦)의 ≪한국한시대관 韓國漢詩大觀≫(1∼5)과 손준호(宋雋鎬)의 ≪한국명가한시선 韓國名家漢詩選≫Ⅰ 등은 그 하한이 고려 말에서 그친 미완성의 역주 시선집이지만, 한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해내어야 할 중요한 책무의 한 부분을 다한 것들이다.

한문 문장에 대한 연구성과는 1970년대 초반까지도 나타날 조짐이 보이지 않았으나 김도련(金都鍊)에 의하여 <고문의 원류와 성격>(1979), <영재 이건창(寧齋李建昌)과 창강 김택영(滄江金澤濚)의 고문관(古文觀)>(1980) 등이 발표되면서 등록이 된 셈이다.

오랜 기간을 지나 정민(鄭珉)의 <조선후기 고문론 연구>가 뒤를 이었으며, 1990년대에 접어들어 박지원(朴趾源) 산문의 본격적인 연구서라 할 수 있는 ≪열하일기 熱河日記≫(1990)가 김명호(金明昊)에 의하여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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