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전운옥편
전운옥편
언어·문자
개념
중국의 고유 문자이자 한국 · 일본 · 월남 등 주변국에서 특히 차자표기(借字表記)를 담당하는 용도로 두루 쓰인 동아시아 주요 문자의 하나.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한자는 중국어를 표기하는 중국의 고유 문자로 출발하여 한국 · 일본 · 월남 등 주변국에서 특히 차자표기(借字表記)를 담당하는 용도로 두루 쓰인 동아시아 주요 문자의 하나이다. 대표적 표의문자로서 초기에는 결승·서계·회화에서 시작하여 ‘상형·지사·회의·형성’의 구성원리와 ‘전주·가차’의 운용원리 등 육서의 조자원리가 발전하면서 정착되었다. 갑골문에서 이미 그러한 조자원리가 나타난다. 진시황 때 서체가 전서로 통일됐고 실무에 편리한 예서체로 고쳐졌다. 후한 때 예서를 개량한 해서가 정체라는 표준 자체로 되었고 이후 필사에 편리한 초서 · 행서 등이 갖춰졌다.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는 우리나라의 상용 문자이기도 해서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 국어를 표기하는 향찰(鄕札) · 이두(吏讀) · 구결(口訣) 등 한국적 사용법이 발전하기도 했다.

정의
중국의 고유 문자이자 한국 · 일본 · 월남 등 주변국에서 특히 차자표기(借字表記)를 담당하는 용도로 두루 쓰인 동아시아 주요 문자의 하나.
개설

뜻과 소리의 결합을 말이라고 한다면, 말을 시각적인 기호로 나타낸 것이 글자이다. 그러므로 글자는 먼저 소리를 단위로 하여 만들어 놓고 그것을 모아서, 뜻의 한 단위를 적어내게 할 수도 있고, 뜻을 단위로 먼저 글자를 만들어 놓고 그 뜻에 맞는 소리대로 읽을 수 있다.

소리를 단위로 만들어진 글자를 표음문자(表音文字)라 하고, 뜻을 단위로 만들어진 글자를 표의문자(表意文字)라 한다. 표음문자는 한 글자가 곧 한 단위의 소리에 해당할 뿐이며, 그것만으로 뜻을 드러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표의문자는 한 글자가 곧 한 단위의 뜻을 반드시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뜻에 해당하는 소리까지도 아울러 드러낸다. 한자는 한족(漢族)이, 그들의 말인 중국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글자이니, 표의문자의 하나로 대표적이라 할 만하다.

한자는 이 같이 대표적인 표의문자이기도 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표어문자(表語文字)라고 불리기도 한다. 표어문자라는 말은 그 글자대로 뜻을 풀이하면 ‘단어를 표기하는 문자’라는 뜻이다. 중국어의 모든 단어가 한 음절로만 되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나, 대부분의 단어가 한 음절로 되어 있으니 이른바 단음절어(單音節語)라는 것이다.

이들 단어의 하나 하나를 한 글자로 표기한 것이 한자이니, 한자를 표어문자라고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자는 한 글자가 곧 한 음절이요, 또한 단어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언절구 · 칠언율시 등과 같은 한시 형식을 지시할 때에도 드러나고 있으니, 일언(一言)을 곧 일자(一字)로 파악한 이들의 전통적 견해를 반영한 것이다.

한자의 기원

한족은 그 민족의 역사가 오래인 만큼 그들의 문자생활도 매우 일찍부터 열려 있었다.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양의 문자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한자가 지금의 모양으로 발달하기까지는 오랜 시일과 점진적인 몇 단계의 변천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여러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한족도 아득한 옛날의 어느 단계에는 먼저 결승(結繩)을 사용한 듯하고, 이어서 서계(書契) · 회화(繪畫) 등으로 발전되고, 거기서 다시 문자로 발전하여 정착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전하는 기록과 한자의 글자 모양 등에 남아 있는 흔적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한자를 처음 만든 사람에 대하여는 문헌상으로 대개 다섯 가지 설이 전하여 온다. 복희(伏羲), 주양(朱襄), 창힐(倉頡), 저송(沮誦) · 창힐, 범(梵) · 겁로(怯廬) · 창힐 등이 그것이다.

이들 가운데에서 창힐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창힐에 대하여도 다시 세 가지의 설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는 창힐을 상고의 제왕(帝王)으로 보는 견해, 둘째는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으로 보는 견해, 셋째는 시대의 의인화(擬人化)로 보는 견해인데, 이 중에서 황제의 사관으로 보는 둘째 견해가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리하여 일반 사람들은 대개 한자를 만든 사람은 황제의 사관 창힐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한자와 같은 표의문자는 표음문자와는 달리 그 글자 수가 너무 많아서 한두 사람이 단시일에 만들어 낼 수는 없었을 것이고, 창힐은 다만 초기 단계의 글자들을 크게 정리하였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와 같은 설의 한 근거로는 갑골문(甲骨文)의 많은 이체(異體)를 들고 있는데, 갑문(甲文)에 쓰인 ‘人’자의 이체는 78종이나 된다고 한다.

한자의 발생 기원이 오래인 것만은 사실이나, 그 시기를 정확히 밝혀내기는 어렵다. 알려져 있는 가장 오랜 한자는 허난성(河南省) 샤오툰촌(小屯村)의 은허(殷墟)에서 출토된 갑골문자가 있다.

이 갑골문자는 이미 회화와는 거리가 멀고, 조자방법(造字方法)에서도 육서(六書)를 갖추고 있어서, 문자로서의 갖추어야 할 것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한자의 발생 기원은 은대(殷代)보다도 더욱 오랜 옛날에 있었다 할 것이다.

은나라 때의 갑골문이 주나라 때에 이르면 그 자체(字體)가 일변하여 대전(大篆) 혹은 주문(籒文)이라 부르게 되는데, 주나라 선왕(宣王)의 태사(太史) 사주(史籒)가 만들었다고 한다.

춘추전국시대에는 각국에 서로 다른 자체가 쓰이다가 진(秦)나라 시황(始皇) 때에 승상 이사(李斯)가 대전을 정리하여 문자의 통일을 이루어내니 이것을 소전(小篆)이라 하고, 또 옥리(獄吏) 정막(程邈)이 실무에 편리한 자체로 고치니 이것이 예서(隷書)라는 것이다.

한나라 때에는 예서가 통행문자로 되니, 이를 금문(今文)이라 하고, 선진(先秦)의 죽간(竹簡)에 쓰인 과두문자(蝌蚪文字)와 종정(鐘鼎)에 쓰인 금석문자(金石文字)를 고문(古文)이라 총칭하게 되었다. 후한의 왕차중(王次仲)은 한예(漢隷)를 다시 개량하여 해서(楷書)를 만드니, 그 뒤 이것이 정체(正體)라 불리고, 표준자체가 된 것이다.

삼국 이후에는 필사에 편리한 초서(草書) · 행서(行書) 등이 생기고, 육조(六朝) · 당나라 때에는 서도(書道)가 크게 행하여지게 되었다. 한자의 자체와 서체(書體)가 이에 두루 갖추어지게 되었다.

한자의 조자원리: 육서

한자의 조자원리에는 예로부터 육서라는 것이 있었다. 『주례(周禮)』 지관(地官) 소사도(小司徒)에 “여덟 살이면 소학에 들어가고, 보씨가 국자(國子:公卿大夫의 孫)를 가르치되, 먼저 육서로써 한다〔八歲入小學 保氏敎國子 先以六書〕.”고 하였고,

유흠(劉歆)의 『칠략(七略)』,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등이 이에 대한 언급을 한 뒤,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 서(敍)에도 역시 이를 인용하고 그 명목을 지사(指事) · 상형(象形) · 형성(形聲) · 회의(會意) · 전주(轉注) · 가차(假借)로 정하여, 15자씩으로 설명하였다. 이들 육서의 명칭과 차례는 학자에 따라 서로 조금씩 다른 이설을 세우기도 하나, 대체로 허신의 것을 따르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유흠 · 반고(班固) 등은 ‘상형 · 상사(象事) · 상의(象意) · 상성(象聲) · 전주 · 가차’라 하였으며, 정중(鄭衆) · 가공언(賈公彦) 등은 ‘상형 · 회의 · 전주 · 처사(處事) · 가차 · 해성(諧聲)’과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현행 통설은 ‘상형 · 지사 · 회의 · 형성’을 가지고 그 구성의 원리로 보고, ‘전주 · 가차’를 따로 운용의 원리로 보기도 하나, 크게 보아 조자의 원리로 묶어도 무방한 것이다.

상형

상형(象形)이라는 말의 글자 그대로의 뜻은 ‘물형(物形)을 그린다.’로 해석할 수 있으니, 대개 그 원리가 회화(繪畫)에서 멀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천지간의 물형을 그려내, 그것으로 글자를 삼는 방법이니 육서 중에서도 기본적인 방법이라 할 만하다.

더구나 한자 어느 글자를 보더라도 다소간은 회화적 성질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면, 이 상형의 방법은 육서의 원천이라 할 만하니 한자를 상형문자라고도 부르고 있음은 바로 이와 같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다만 상형만으로 만들어진 글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송나라 정초(鄭樵)의 통계에 의하면, 그가 분류한 문자 총수 2만 4235자 중 상형자는 608자에 불과한 것으로 나와 있다. 상형이 육서의 기본이기는 하나 상형만으로 모든 글자를 만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상형으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면, ‘日 · 月 · 山 · 川 · 水 · 艸 · 木 · 人 · 目 · 馬 · 鳥 · 魚 · 弓 · 門’ 등과 같다.

지사

상사(象事) 혹은 처사(處事)라고도 하나 그 뜻은 같다. ‘지사(指事)’의 글자 그대로의 뜻은 ‘일을 가리킨다.’가 되나, 추상적인 개념을 나타내기 위한 글자이다. 상형은 바로 그려낼 수 있는 실물이 있으나, 지사는 바로 그려낼 수 있는 실물이 없다.

상형은 형상을 본떠야 하므로 그 형상이 일정하게 일종(一種) · 일류(一類) 물상에서 나오는 것이지마는, 지사는 일정한 사상(事象)을 그려내야 하므로, 그와 같은 사상을 드러내는 물상이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에 걸쳐 있다. 이때에 이 여러 가지에서 나타나는 사상을 그려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사의 방법으로 만들어진 글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지사의 방법으로 만들어진 몇 글자를 예로 들면 ‘上 · 下 · 一 · 二 · 三 · 五 · ㅣ’ 등과 같다. 一조(條) 위에 일점(一點)을 획(劃)하여 ‘ᅟㆍㅡ(上)’을 지으니, 이는 어떠한 것이 어떠한 것 ‘위’에 있음을 가리킨다.

다시 一조 아래에 일점을 획하여 ‘⨪(下)’를 지으니, 이는 어떠한 것이 어떠한 것 ‘아래’에 있음을 뜻한다. 이 때에 어떠한 것이란 땅이라도 좋고 하늘이라도 좋고 산이라도 좋고 물이라도 좋은 것이니, 그 어떠한 것이란 일정한 한 가지 물체에 매인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물체가 다 어떠한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지사’는 여러 가지 것에 걸쳐서 드러나는 일이나 상태를 가리킨다. 한 획을 가로로 그어 ‘一’을 지으니, 천지간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물건이 개별적으로 드러난 일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크거나 작거나 관계없다.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집 한 채, 차 한 대, 바위 한 덩어리가 다 같이 따로따로 있을 때 그것은 하나가 아닌 것이 없다. 이때의 하나가 존재하는 양상은 일정하지가 않으니, 어느 것의 구체적인 모양을 그려낼 수가 없다.

그러므로 결국 이 모든 것들의 개별적임을 뜻하기 위하여 ‘一’조를 획하여 ‘一’의 글자를 지으니, 그것이 ‘一’이라는 글자이다. ‘二, 三’은 ‘一’자를 거듭한 것이니, 이들 글자를 만든 이치는 같은 것이고, ‘四 · 五’자도 아주 옛날에는 ‘一’자를 네번 거듭하거나, 다섯번 거듭하여 ‘𝍣 · 𝍤’와 같이 쓴 일이 있으니, 이치는 또한 한가지이다.

세로로 그은 一조는 독음(讀音)이 둘이 있고 뜻도 둘이 있으니, 아래에서 위로 그어 올리면 음(音)이 ‘진(進)’이요 뜻도 ‘진(進)’이며,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으면, 음이 ‘퇴(退)’요 뜻도 ‘퇴(退)’가 되니, 글자를 이와 같이 만들어 내는 것이 지사이다. 이러한 지사자는 만들기가 어려워서인지, 글자가 많지 않다.

회의

이미 이루어진 두세 글자의 뜻을 모아, 또 다른 한 뜻을 나타내는 방법이다. ‘회의(會意)’의 글자 그대로의 뜻은 ‘뜻을 모은다.’이니, 『설문해자』에서 ‘비류합의(比類合誼)’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뜻이다. 이류(二類) · 삼류(三類)의 이미 이루어진 글자를 배비(配比)하여 그 뜻을 모아 한 글자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아지는 글자는 상형 · 지사 · 회의 · 형성의 어느 글자라도 좋다. ‘武 · 信’은 대표적인 회의자의 예로 알려진 글자이다. ‘武’는 ‘戈’와 ‘止’의 뜻을 합한 것으로 간과(干戈)를 중지하여 천하를 태평으로 이끈다는 것이 본의(本義)이다.

여기서 ‘戈’와 ‘止’는 다같이 상형자인 것이다. ‘信’은 ‘人’과 ‘言’의 뜻을 합한 것으로 사람의 말은 서로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에서 ‘信’의 뜻을 드러낸다. 여기서 ‘人’은 상형자요 ‘言’은 형성자이다.

이와 같이 회의자의 분류는 그 구성요소로 쓰인 글자가 육서 중의 어떤 것들과 합쳐졌느냐에 따를 수도 있고, 또 이들 구성요소들의 동이(同異)를 준하여 동체회의(同體會意 · 同文會意) · 이체회의(異體會意 · 異文會意) · 변체회의(變體會意) · 겸성회의(兼聲會意)로 나눌 수도 있다.

동체회의란 그 구성요소들이 같은 글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니, 예를 들면 ‘林 · 姦 · 轟’ 등과 같은 것이다.

이체회의란 구성요소들이 서로 다른 글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니, 예를 들면 ‘位 · 看 · 易 · 鳴 · 好’ 등과 같은 것이다.

변체회의는 혹 ‘성체회의(省體會意)’라고도 하는데, 구성요소들의 자획에 가감이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老’와 ‘子’에서 ‘孝’를 만들고, ‘寢’과 ‘未’에서 ‘寐’를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겸성회의란 구성요소 중의 하나가 의미와 음성을 겸하여 가지고 있는 경우인데, 예를 들면 ‘仕:學也, 从人士, 士亦聲’, ‘叛:半反也, 从半反, 半亦聲’, ‘否:不也, 从口不, 不亦聲’, ‘娶:取婦也, 从女人取, 取亦聲’ 등과 같은 것이다.

형성

한 자〔一字〕를 이루는 구성요소의 한쪽이 의미를 지시하고, 나머지 한쪽이 음성을 지시하는 것이다. 이를 상성(象聲) 혹은 해성(諧聲)이라 부르기도 하나 지시하는 바는 같은 것이다. 형성(形聲)은 한자 구성법 중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것으로 문자 총수의 8∼9할이 이 방법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부수(部首)로 글자를 찾아보는 자전(字典)인, 이른바 옥편(玉篇) 같은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같은 부수 아래 많은 글자가 모여 있는 것이다. 이들 부수는 대개 의미를 나타내는 요소, 즉 형부(形符)이기도 한데, 여기에 음성을 나타내는 요소, 즉 성부(聲符)가 결합되어 한 글자로 표시되어 있다.

‘江 · 河’와 같은 것은 왼쪽의 수부(水部)가 형부이며, 바른쪽의 ‘工 · 可’가 성부로 되어 있으니, 좌형우성(左形右聲)으로 결합된 글자이며, 같은 이치로 ‘鳩 · 鴨’과 같은 것은 우형좌성(右形左聲)이요, ‘草 · 藻’와 같은 것은 상형하성(上形下聲)이요, ‘婆 · 娑’와 같은 것은 상성하형(上聲下形)이요, ‘圃 · 國’과 같은 것은 외형내성(外形內聲)이요, ‘問 · 聞’과 같은 것은 외성내형(外聲內形)이라 할 만하다.

같은 형부와 같은 성부가 언제나 꼭 같은 의미와 음성을 지시하지는 않지만 같은 형부는 대개 공통으로 관련된 의미를 지시하며, 같은 성부는 대개 공통 자질을 가진 비슷한 음성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목부(木部) 아래 수록된 글자는 대개 나무와 관련된 글자이며, 공(工)을 성부로 가진 글자는 그 음성이 공(工)과 같거나 가까운 것이다. ‘松 · 柏 · 枾 · 梨’는 나무 이름이요, ‘江 · 紅 · 貢 · 空’은 음성이 서로 비슷하다.

전주

전주(轉注)에 대한 해석은 고래로 의견이 분분하나, 대체로 두 가지 설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전주를 ‘구성’ 즉 조자법(造字法)으로 보느냐 혹은 ‘운용(運用)’ 즉 용자법(用字法)으로 보느냐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주를 문자 구성의 한 방법으로 보는 견해는 청나라 때의 강성(江聲)에 의하여 대표될 수 있다.

강성의 『육서설(六書說)』은 『설문해자』 서설(敍說)의 설명을 기반으로 전개된 것이다. 즉, “轉注者 建類一首 同意相受 考老是也”에서 ‘一首’의 뜻을 한 부수와 같이 해석하고 ‘同意相受’는 그 일부수(一部首)에 의하여 숫자(數字)의 의미가 같은 것으로 된다고 보는 것이다.

‘考 · 耋 · 耄 · 耆’ 등은 ‘老’라는 일수(一首)를 취하여 같은 유(類)가 되니, 그 뜻도 ‘老’로 더불어 같은 뜻을 가진다고 보는 것이다. 『설문해자』 일서(一書)에는 이와 같은 부수가 ‘一’에서 시작하여 ‘亥’에서 끝나고 있으니, 무릇 540부가 된다.

그러니까 이 540부의 하나하나가 이른바 일수(一首)가 되고, ‘凡某之屬 皆从某’하여 한 부류(部類)에 속한 여러 글자가 어떠한 부수를 좇아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인 것은 바로 ‘同意相受’ 즉 같은 뜻을 가진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강성의 이 같은 견해는 『설문해자』의 서를 근거로 출서(出敍)한 것이므로 이 설의 정당성은 『설문해자』 서와 그 540부수가 먼저 정당한 것이 되고 나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육서의 설(說)은 『설문해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부수의 수가 언제나 540은 아니다. 이 점이 바로 이 견해의 약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주를 문자 운용의 한 방법으로 해석하는 견해는 단옥재(段玉裁)에 의하여 대표된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한자가 한 사람에 의하여 한 곳에서 일시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같은 뜻을 지시하면서 그 자형(字形)과 자음(字音)이 꼭 같지는 않더라도 대동소이한 문자가 둘 이상 있을 수 있다.

이른바 ‘이자동의(異字同意)’의 글자나, ‘일의수문(一義數文)’의 글자들이 그러한 것이다. 둘 이상 있는 이러한 동의(同意)의 제자(諸字)들은 그 뜻을 기준하여 일류(一類)로 묶을 수 있으니, 이것이 『설문해자』에서 이른바 ‘建類一首’가 되는 것이고, 이때에 이들 동의를 드러내는 제자들은 ‘호훈(互訓)’이 가능하니, 이 ‘호훈’이 또한 『설문해자』에서 이른바 ‘同意相受’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考’와 ‘老’ 두 글자는 각각 ‘考 老也’, ‘老 考也’와 같이 ‘호상위훈(互相爲訓)’할 수 있는 운용관계를 갖는데, 이러한 것을 전주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전주는 『이아(爾雅)』의 훈석(訓釋) 등에서 일찍부터 쓰여 오던 방법이니, 전주를 이와 같은 운용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로 알려져 있다.

가차

가차(假借)는 일자수용(一字數用)의 운용방법을 가리킨다. 이 점은 상술한 바 전주가 동일의의(同一意義)에 여러 글자가 있어서 서로 호훈(互訓)의 운용을 보이던 바와 대조적이라 할 만하다. 여러 글자가 동일한 뜻으로 쓰이던 전주에 비하여, 동일한 글자가 몇몇의 동일하지 않은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이다.

글자가 있기 전에 말이 먼저 있고, 말을 좇아 글자가 만들어졌겠으나, 말만 있고 글자가 미처 만들어지지 아니한 경우도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경우 이미 만들어진 글자 중에서 그 말과 음성이 같거나 비슷한 글자를 빌려 쓰는 것이 바로 가차인 것이다.

『설문해자』의 서가 “本無其字 依聲託事”라고 설명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차로 쓰인 글자는 그 글자 본래의 뜻과 가차된 뜻이 따로 있게 된다. 『설문해자』 서에서 ‘令 長 是也’라고 한 것은 ‘令 · 長’이 본래의 뜻이 있으면서, 그 본래의 뜻대로 쓰이지 않고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을 경우를 예시하고 있다.

‘令, 長’의 본래의 뜻은 ‘발호(發號)’와 ‘구원(久遠)’이었다. 이들 글자는 그 본래의 뜻대로 쓰이기도 하지만, 다른 뜻으로 가차되기도 하니, ‘현령(縣令), 현장(縣長)’의 경우가 그러한 것이다.

한인(漢人)은 현의 우두머리를 현령 · 현장으로 부르고 있었으나, 이를 적을 글자가 없어, 이미 있는 영(令) · 장(長)을 빌려서 표기하였던 것이다. ‘조(蚤)’자는 벌레의 이름인 ‘벼룩’을 뜻하는 글자였는데, ‘이르다〔早〕’의 뜻으로 가차되고, ‘혁(革)’은 본래 ‘가죽’을 뜻하나 ‘고쳐 바꾸다’의 뜻으로 가차된다.

무리[群]를 지시하던 ‘붕(朋)’이 ‘벗’의 뜻으로 가차되고, 까마귀를 지시하는 ‘오(烏)’가 감탄의 뜻으로 가차되는 것이다. ‘令 · 長 · 蚤 · 革 · 朋 · 烏’가 그 본래의 뜻대로 쓰이지 않고, 다른 뜻을 지시할 적에 가차가 되는 것이다. 요컨대, 육서란 한자의 네 가지 구성법과 두 가지 운용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한자 개혁

한자는 중국문화를 담고 있는 훌륭한 그릇이다. 한족(漢族)은 이들 문자에 의하여 그들의 높은 문화를 창조하여 왔고 독특한 문학 · 예술을 발전시켜 왔으며, 훌륭한 문헌기록 등을 남겨 주고 있다. 이는 모두 한자의 덕택이니, 한자의 공은 참으로 크다고 할만하다.

그러나 한자를 표기수단 일반의 한 문자로서 볼 때, 한자에도 다소간의 결함이 없지는 않다. 한자는 표어문자이므로 글자의 수가 단어의 수만큼 있어야 한다는 불편이 있다. 새로운 단어는 새로운 문자를 다시 필요로 한다. 또 만들어진 모든 글자를 모두 기억하여 올바로 쓰기가 어려우며 기계화도 어렵다.

이리하여 서구문명에 접한 한족은 그들의 문자를 개혁하려는 노력이 일어나게 되었다. 노당장(盧贛章)의 『중국제일쾌절음신자(中國第一快切音新字)』(1892), 왕조(王照)의 『관활합성자모(官活合成字母)』(1900), 노내선(勞乃宣)의 『간자전보(簡字全譜)』(1907)와 같은 것은 표음문자로 바꾸어 적어보려는 것이었고, 중화민국이 수립되자 주음자모(注音字母: 뒤에 注音符號로 개칭)가 공표되기에 이르렀으나(1918), 종래의 한자표기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한자 사용은 중국은 물론 한국 · 일본 · 베트남 등 인접한 여러 나라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다.

우리나라와 한자

한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중국과 접경하여 있는 나라이므로 한 · 중 양민족의 접촉은 일찍부터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한자의 전래도 그 무렵에 시작하여 시대가 지남에 따라 차츰 늘어났을 것이다.

학교가 생기고, 중국 유학생의 내왕이 있다가, 6, 7세기경에는 중국과의 외교문서가 오고 갔으며, 명문(銘文) · 탑기(塔記) · 작품 등의 기록이 이미 등장하고 있었으니, 이 무렵에는 이미 한자의 사용이 크게 일반화되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한자의 전래로 문자생활을 시작한 우리 민족이 한자 본래의 사용법에 접하게 되고 아울러 다소간의 독특한 사용법을 창출하였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는 문자와 언어가 일치하지 않는 데에서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추세였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한자 사용을 한국어 중심으로 생각할 경우 두 가지의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의미를 중심으로 표기하려고 하면 발음을 적을 수가 없고, 발음을 중심으로 표기하려고 하면 의미를 분명하게 표기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표기의 필요는 다소라도 정치제도가 갖추어지면, 부득이한 추세였을 것이다. ‘居西干 · 次次雄 · 尼師今 · 麻立干’ 등 초기의 왕호는 이들 한자어로 본다면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니, 한국어를 발음 중심으로 표기하였다고밖에는 볼 수 없을 것이다.

‘密城郡 本推火郡’,‘德水縣 本高句麗 德勿郡’,‘石山縣 本百濟 珍惡山縣’ 등의 지명에서 개혁되기 전의 ‘推火 · 德勿 · 珍惡’ 등도 한자를 이용하여 지명을 표기한 것이었고, 향가(鄕歌)의 표기 등은 한자를 이용하여 시가를 표기한 것이다.

이렇게 한자의 음 · 훈을 빌려서 국어를 표기하는 방법이 일찍이 창출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이라는 것이다. 이 차자표기법은 더욱 확대되어, 경서의 독법에 따른 현토(懸吐) · 구결(口訣) 표기 및 서리(胥吏)의 사무용어인 이두(吏讀)까지 이용되었으니, 이는 한자의 한국적 사용법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차자표기법은 그 사용법이 그 본래의 방법과 다른 만큼, 그에 따른 몇몇의 독특한 글자를 만들어 내기까지 하였으니, 이른바 속자(俗字) 혹은 한국한자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들 속자는 비록 얼마 되지는 않지만 한국한자로서만 사용되는 특별한 글자이다.

즉, 刀(도):升也(鷄林類事 및 公私文簿 등에 보임.), 干[강]:薑也 새양(醫方에 보임.), 太(태):大豆也 콩(官簿에 쓰임.), 乭(돌):石也(又兒名 · 奴名 등에 많이 쓰임.), 畓(답) 水田 논(公私文書에 보임.), 旀(며):句讀 하며(吏讀 등에 붙임.) 등이 그것이다.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 우리 민족이 사용했던 문자는 오직 한자였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한자의 사용은 줄지 않았으며, 문자생활의 지배적 수단이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임진왜란을 지나고, 영조 · 정조 무렵의 고대소설 등이 등장하면서 정음(正音)의 사용이 점차 증가하여 왔으며,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정음의 사용이 크게 증가하였으나 한자 사용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시기 이후의 문자생활의 주도권은 점차 한자에서 정음으로 이행하는 경향을 띠기 시작하였다.

1945년 이후 한자폐지론 · 한글전용론이 거듭 제기되어 1957년 10월 18일 문교부에 의하여 상용한자(常用漢字) 1,300자가 선정되고, 다시 1967년 12월 18일 한국신문협회가 상용한자 2,000자를 선정하였다.

1970년에는 모든 공문이 한글로만 쓰이게 되고, 초 · 중 · 고등학교의 모든 교과서에 한자의 노출 표기가 없어지자, 한자의 사용은 크게 줄었다. 1972년 8월에는 문교부가 다시 1,800자의 중등학교 교육용 한자를 제정, 발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한자학총론』(이돈주, 박영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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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정연찬(서강대학교, 국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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