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공부(公溥). 안동부사 송여해(宋汝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성부서윤 송세충(宋世忠)이고, 아버지는 우참찬 송기수(宋麒壽)이다. 어머니는 대사헌 채침(蔡忱)의 딸이다.
1555년(명종 10) 식년시에 생원으로 급제하였고, 1564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65년(명종 20) 홍문관의 정자(正字)·저작(著作)을 거쳐서 홍문관의 박사·부수찬(副修撰),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내고, 예조정랑으로 『명종실록(明宗實錄)』 찬수에 참여하였다. 1570년(선조 3)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가 된 뒤, 1573년 함경도에 재상어사(災傷御史)로 파견되었다.
이 때 덕원부사 안상(安瑺) 등이 무죄인데 파직시켰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고, 시강관(侍講官), 홍문관의 부응교(副應敎)·부교리, 사간원의 사간·집의(執義), 홍문관응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579년 승지로서 소위 이수(李銖)의 옥사에서 이를 석방하라는 왕의 명령을 철회할 것을 청하다가 다시 파직당하였다. 1583년 대사간이 된 뒤, 동·서 분당(分黨) 이후에는 동인의 중진으로서 활약하였다.
이 때 헌납 유영경(柳永慶), 정언 정숙남(鄭淑男), 도승지 박근원(朴謹元),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허봉(許篈)과 함께 이이(李珥)를 탄핵하다가 장흥부사로 좌천되고, 다시 회령에 유배되었다.
강계·갑산에 귀양간 박근원·허봉과 아울러 세칭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하였다. 이 때 조헌(趙憲)을 비롯, 전라도·해주 등지의 유생들로부터 맹렬한 배척을 받았다. 1585년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의 상소로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