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시(子始), 호는 학산(鶴山). 홍문관교리 이상질(李尙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랑 이훤(李藼))이고, 아버지는 진사 이한익(李漢翊)이며, 어머니는 현령 남일성(南一星)의 딸이다.
1696년(숙종 22)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예문관검열이 되고, 1699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이해 홍문록(弘文錄)에 뽑혔으며,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오빠인 김진구(金鎭龜)의 월권행위를 비판하는 상소로 체자(遞差)되었다. 이듬해 홍문록에 오르고, 다시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이어 1701년 홍문관수찬이 되고, 1703년에는 부교리에 올랐으며, 1705년에는 교리가 되었다. 이듬해는 이조정랑이 되었고, 세자시강원사서를 겸하였다. 그 뒤 1707년에는 의정부사인을 거쳐 홍문관부응교가 되고, 이어 사헌부집의로 세자시강원필선을 겸하였다. 이듬해는 훈련도감의 법도가 해이해짐을 비판, 이를 개혁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어 사간이 된 뒤 당시 군위현감이던 이정사(李廷師)의 체차는 당시 흉년이 든 지방사정으로 보아 부당함을 들어 그를 변호하였다. 1709년에는 홍문관응교로서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도록 명을 받았다. 이때 그가 응제한 시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상을 받기도 하였다.
이듬해 승지가 된 뒤 강원도관찰사로 나아가 치적을 높였으나 어머니의 병환으로 자신의 경내 가까이 모신 일로 물의가 일자 사직을 청하여 체차되었다. 1712년 어머니 상을 당하여 벼슬을 그만둔 뒤 1718년 예조참의로 다시 벼슬길에 복귀하였다. 이어 강원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차례로 역임하였고, 이듬해는 경기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720년에는 고부사(告訃使)의 부사(副使)로 청나라를 다녀온 뒤 예조참판에 올랐다. 이듬해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도승지가 되어 왕을 보필하였고, 이후 노론이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을 앞세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요청하면서 정권을 차지하려 하자 경종 보호에 앞장섰다.
1721년 형조판서로서 임인옥사를 다스려 노론4대신을 축출하는 데 참여하였고, 이어 대사헌·예조판서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여당인 홍계적(洪啓迪) 등과 함께 노론으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723년에는 예조판서가 되었는데 노론측에서 조광조를 모신 도봉서원(道峰書院)에 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공론이 일자 그도 공론에 찬성하였다. 이어 세자시강원의 좌·우빈객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내의원제조·예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이 해 경종이 승하하자 이조판서로서 청나라에 파견할 고부사와 청시사(請諡使)의 차출을 청하였다. 영조가 즉위하자 즉시 정치적 타격은 입지 않아 종부시제조·내의원제조 등을 지냈으나가 1725년(영조 1)에 관작을 삭탈당하고 문외출송되었다.
이는 경종 재위시 임인옥사 때 왕과 청대(請對)한 것과 옥사를 다스렸기 때문에 노론으로부터 정치적인 보복을 당한 것이다. 이듬해 경상도 밀양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과 4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는데, 청렴결백하다는 소문이 높았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