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령(宜寧). 할아버지는 남채로(南綵老)이며, 아버지는 남이수(南履綏)이다. 서울에서 살았으나, 민심이 흉흉해지자 피난한다는 핑계로 충청도 목천현(木川縣) 곡간리(曲澗里)로 이주하였다.
1836년 남경중(南慶中)·남공언(南公彦)·문헌주(文憲周) 등과 반란을 모의하였는데, 모의 내용은 은언군(恩彦君)의 손자를 왕으로 추대하여 자신은 도총집(都摠執), 남경중을 좌총집으로 하여 먼저 청주성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시흥의 이속(吏屬) 천기영(千璣英)이 사전에 고변함으로써 이 계획은 실행하기도 전에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관련자들이 모두 체포되자, 일본으로 탈출하려고 동래에 있는 왜관에 들어가 왜인들에게 자신의 탈출을 도와줄 것을 간청하였지만, 거절당하고 도리어 그들에게 잡혀서 우리 관헌에게 인도되었다.
이에 정부는 남응중을 대역부도의 죄명으로 능지처참하여 그 수급을 왜관에 현시(懸示: 죽은 자의 목을 걸어두고 경계로 삼던 일)하게 하였다.
또한 이 모의에 가담한 남경중·남공언·문헌주 등 20여 명을 극형에 처하였다. 고변자인 천기영은 대왕대비의 명령으로 오위장의 벼슬이 주어졌으며, 일본과의 우의를 두텁게 하는 의미에서 범인을 잡아 인도하여준 왜관의 관수왜(館守倭)에게는 은자(銀子) 1천 냥을 보내어 고마운 뜻을 전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