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운경(雲卿). 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박석민(朴碩敏)이다.
1715년(숙종 41) 36세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1728년(영조 4) 아오지만호(阿吾地萬戶)에 임명되어 부임하는 도중에 양주에서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만호의 관직을 우선 버려두고 이 반란의 토벌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박경태는 토벌군의 도원수로 임명된 오명항(吳命恒)에게 달려가 토벌군으로 종군할 것을 청하여 휘하병이 되었다. 이 토평군으로 출범하여 안성·죽산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갈파지첨사(乫坡知僉使)와 동관진첨사(潼關鎭僉使)·장기현감을 제수받았으나 부모 봉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뒤에 중추부(中樞府)의 관직이 다시 내려졌고, 품계는 종2품인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