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호(士豪), 호는 서호산인(西湖山人). 할아버지는 부사(府使) 박원진(朴元震)이며, 청주에서 살았다.
도량과 재간이 뛰어나고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여 소년 때부터 이름이 났다. 뒤에 장신(將臣) 장붕익(張鵬翼)과 이봉상(李鳳祥)이 각각 국사(國士)로서 조정에 천거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 등이 반란을 일으켜 청주를 함락하면서 충청병사(忠淸兵使) 이봉상과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을 죽였다.
이때 마침 서울에 있다가 반란의 소식을 듣고는 급히 고향에 돌아와 군사 수백 명을 모집, 반적(叛賊)의 토벌에 나서 대신들의 추천으로 충청병마우후 겸 창의사(忠淸兵馬虞候兼倡義使)로 임명되어 신천영(申天永) 등 20여 인의 목을 베어 조정에 올려보냈다.
이어 이인좌와 사전에 치밀한 모반계획을 세운 바 있는 정희량(鄭希亮)이 경상도의 안음(安陰: 지금의 안의)·거창·합천 등지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다시 상주영장 겸 영남창의사(尙州營將兼嶺南倡義使)에 임명되어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곧 인수(印綬)를 풀고 돌아왔다가 조정의 명령이 없이 임지를 무단 이탈하였다는 죄목으로 고향에 잠시 유배되었다. 그 뒤 해미현감(海美縣監)을 거쳐 창성부사(昌城府使)가 되고, 1732년 강계부사에 임명되어 창성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