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유 ()

이진유 글씨
이진유 글씨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좌부빈객, 대사성,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사진(士珍)
북곡(北谷)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69년(현종 10)
사망 연도
1730년(영조 6)
본관
전주(全州)
주요 관직
이조참의|부제학|좌부빈객
관련 사건
신임사화
정의
조선 후기에, 좌부빈객, 대사성,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진(士珍), 호는 북곡(北谷). 이경직(李景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정영(李正英)이고, 아버지는 참판 이대성(李大成)이며, 어머니는 홍만용(洪萬容)의 딸이다. 이만성(李晩成)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07년(숙종 3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그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에 검열에 등용되었다가 그뒤 교리(敎理)·수찬을 지냈다. 1716년 소론으로서『가례원류(家禮源流)』의 서문과 발문에서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을 비난한 필자 권상하(權尙夏)·정호(鄭澔)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삭출(削黜)되었다.

1721년(경종 1) 정언에 기용되고, 이듬해에 사간으로서 세제(世弟: 영조)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건의한 노론의 4대신을 탄핵하여 이들을 제거하였으며, 이어 김일경(金一鏡) 등과 함께 신임사화를 일으켜 노론을 숙청하였다.

경종 때에는 이조참의·부제학·좌부빈객·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724년 경종이 죽자 이조참판이 되어 고부 겸 주청사(告訃兼奏請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에 노론이 등용되자 중앙에서 아주 먼 외딴 지역에 안치되었다가 중앙에 압송되어 문초를 받던 중 옥사하였다. 순종 때 복권되었다.글씨에 뛰어났으며, 작품으로 「망일사은비(望日思恩碑)」·「명위관임제비(明委官林濟碑)」의 비문을 남겼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청선고(淸選考)』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박익환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