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진(士珍), 호는 북곡(北谷). 이경직(李景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정영(李正英)이고, 아버지는 참판 이대성(李大成)이며, 어머니는 홍만용(洪萬容)의 딸이다. 이만성(李晩成)에게 입양되었다.
1707년(숙종 3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그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에 검열에 등용되었다가 그뒤 교리(敎理)·수찬을 지냈다. 1716년 소론으로서『가례원류(家禮源流)』의 서문과 발문에서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을 비난한 필자 권상하(權尙夏)·정호(鄭澔)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삭출(削黜)되었다.
1721년(경종 1) 정언에 기용되고, 이듬해에 사간으로서 세제(世弟: 영조)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건의한 노론의 4대신을 탄핵하여 이들을 제거하였으며, 이어 김일경(金一鏡) 등과 함께 신임사화를 일으켜 노론을 숙청하였다.
경종 때에는 이조참의·부제학·좌부빈객·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724년 경종이 죽자 이조참판이 되어 고부 겸 주청사(告訃兼奏請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에 노론이 등용되자 중앙에서 아주 먼 외딴 지역에 안치되었다가 중앙에 압송되어 문초를 받던 중 옥사하였다. 순종 때 복권되었다.글씨에 뛰어났으며, 작품으로 「망일사은비(望日思恩碑)」·「명위관임제비(明委官林濟碑)」의 비문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