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군우(君遇), 호는 당암(戇菴). 합천 출신. 강희필(姜姬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인수(姜仁壽)이며, 아버지는 판관 강세탁(姜世倬)이다.
1589년에 진사가 되고, 1606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의 설서(說書)를 겸하였다.
1609년(광해군 1)에 예조좌랑에 이어 정언 · 헌납 · 지평을 역임, 1612년에 문학(文學), 이듬해 장령 · 사간에 이어 제용감정(濟用監正)에 전직했다가, 다시 사간이 되었을 때 계축옥사가 일어났다. 그때 정온(鄭蘊)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이 잘못임을 상소하였다가 대역죄로 몰려 사형이 논의되자, 병을 핑계하여 사직하였다.
1618년 장남 강대수(姜大遂)가 사간원에 있으면서 쟁론하다 유배되자 충원현감으로 좌천되었다. 뒤에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항소하다가 유배당하였는데, 인조반정 뒤 1631년 아들 강대수의 상소로 풀려나 전적이 되었다. 이듬해 다시 제용감정에 임명되었으나, 왕에게 사은하고 곧 전리(田里)로 돌아가 한가로이 만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