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양경(良卿). 박황(朴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세환(朴世桓)이고, 아버지는 박태진(朴泰進)이며, 어머니는 김덕승(金德承)의 딸이다.
1710년(숙종 36)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이 되고, 이후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쳤다. 1716년 이른바 병신처분(丙申處分)으로 소론이 노론에 의해 밀려날 때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서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소론 중의 준소 계열(峻少系列)의 주요 인물로 활약하였다.
1721년(경종 1) 김일경(金一鏡)·이명의(李明誼)·이진유(李眞儒) 등과 함께 상소해, 왕세제(王世弟: 뒤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 4대신(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의 죄를 성토해 신임옥사를 일으켰다. 그 뒤 소론 정권이 수립되자 지평·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광주부윤·부제학·승지·대사성·이조참의를 거쳐 참찬이 되었다.
1723년에는 강화유수가 되었는데, 이듬해 관병(觀兵: 군사의 위세를 검열함)의 제도를 부활하자고 건의해 허락을 얻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한 뒤 도승지가 되었으나 실록청(實錄廳)에 사사로이 출입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며, 이어 노론의 공격을 받고 갑산(甲山)에 유배되었다.
1728년(영조 4) 소론 급진파인 이인좌(李麟佐)가 청주에서 난을 일으키자 유배지에서 나와 반란에 가담한 태인현감 박필현(朴弼顯)의 군중으로 가 서울로 진군하려 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도(竹島)에 숨었으며, 검모포(黔毛浦)로 가 잔당들과 다시 거사하려다가 무장현감 김몽좌(金夢佐)에게 붙잡혔다. 서울로 압송되어 능지처참되었고, 가문은 몰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