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3년(중종 8) 진사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광주향교(廣州鄕校)의 훈도로 취임했다가, 다음 해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옮겼다. 이어 전적(典籍) · 예조좌랑 · 정언(正言) · 충청도도사 등을 거쳐, 1522년에 지평(持平)이 되었다.
1525년 양친을 봉양하기 위해서 고부군수로 나갔다. 1528년에 부친상을 치르고 이어 헌납(獻納) · 장령(掌令),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 · 사도시부정(司䆃寺副正) 등을 역임하였다. 1531년 어머니 봉양을 위해 사성(司成)을 사퇴하고 보성군수로 나갔다가, 이듬해 사예(司藝)가 되었다. 이어 사성 · 내섬시정(內贍寺正) · 군기시정(軍器寺正) 등을 역임하였다.
1534년 함경도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지방 관서를 순시하던 중, 안원보(安原堡) 권관(權管) 전주남(全周男)이 야인들에게 잡혀갔다가 임의로 소와 말을 주고 풀려난 일을 조정에 보고하여 벌을 받게 하였다. 1536년 승문원판교 겸 춘추관편수관을 역임하고, 이어 통정대부로 승진해 병조참지 ·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수찬관(修撰官)을 지내고 좌승지로 옮겼다. 이어 가선대부로 승진해 호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나주목사로 기용되어 찰리사(察理使)를 겸했고, 전위사(餞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전송하였다. 1537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가 이어 한성부판윤 · 동지중추부사 · 공조참판 · 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539년 오위도총부부총관 · 예조참판 등을 지내고 또 어머니 봉양을 위해서 담양부사로 나갔다가 1542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벼슬을 사양하다가 1546년(명종 1)에 다시 상호군(上護軍)에 나아가 곧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자헌대부로 승진해 지중추부사 · 한성부판윤 ·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50년 우참찬에 임명되어 지경연의금춘추관사와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다. 이듬해에는 경기도관찰사를 겸임했고 숭록대부로 올랐다. 1552년에 우참찬을 비롯, 호조판서 ·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1554년에 지중추부사로 있다가 죽었다.
주세붕(周世鵬)과의 교유가 깊었으며 사람됨이 간중신밀(簡重愼密)하고 예법을 잘 지키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30여 년의 관리 생활에서도 집 한 칸을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청렴결백해 청백리에 뽑혔다. 시호는 정혜(貞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