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정(子定), 호는 유회당(有懷堂)·수만헌(收漫軒). 공주 출신. 예조좌랑 권득기(權得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윤(右尹) 권시(權諰), 아버지는 현감 권유(權惟), 어머니는 산림(山林) 송시열(宋時烈)의 딸이다. 윤증(尹拯)의 문인이다.
1693년(숙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율봉역(栗峰驛)·김천역(金泉驛)의 찰방을 거쳐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그 뒤 1706년에는 정언(正言)을 역임했다.
1695년 함평현령(咸平縣令)·전라도도사, 정언·홍문관수찬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때 김춘택(金春澤)의 전횡을 방관한 죄로 파직되었다.
이어서 1698년 설서, 이듬해 지평을 거쳐 1701년에 사서가 되었고, 부수찬을 거쳐 1710년 동래부사를 역임했다. 당론으로 인해 벼슬길이 순탄하지 못했으나, 1721년(경종 1) 좌의정 이광좌(李光佐)의 천거로 승지에 올랐으며, 이듬해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28년(영조 4)에는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수습한 공으로 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이해 호조판서가 되어 궁중에서 민간의 전답을 매입하지 말 것과 공물을 정액 이상으로 거두지 말 것 등을 건의했다.
1731년 공조판서가 되어 산릉제조(山陵提調)를 겸임하면서 천릉(遷陵: 능을 옮김)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 뒤 1733년에는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해, 국경을 넘어와 위원군(渭原郡)에 숨어 살던 청나라 사람들의 체포를 건의하는 장계를 올렸다. 글씨에도 능했으며, 사람됨이 무실(務實) 강직했다. 저서로는 『유회당집』이 있다. 시호는 공민(恭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