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선경(善慶). 강급(姜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석구(姜碩耉)이고, 아버지는 강억(姜檍)이며, 어머니는 이후(李煦)의 딸이다.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723년(경종 3)에 교리에 승진하였다. 이때 정언 이춘제(李春蠐)로부터 명망이 없는 사람이 바로 청요직에 임명되는 것은 부당하다는 탄핵을 받았지만 대사헌 이진검(李眞儉)의 상소로 무사하였다. 이어 부수찬 · 필선 등을 지내고, 1727년(영조 3)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이래 보덕 · 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장령으로 있을 때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연루된 이도(李燾)를 극형에 처하라고 상소하였다. 곧 이어 사간으로 옮겼는데, 이때 역적과 내통한 전 목천현감 윤취은(尹就殷)과 전 부안현감 이문표(李文標) 등을 극형에 처할 것을 건의하여 영조의 윤허를 얻었다.
1729년에 상소하여, 교서(敎書)의 말을 간명하게 할 것과, 탕평책(蕩平策)의 시행을 틈타 임금을 속이려는 계략을 쓰는 무리들을 경계하라는 건의를 하여 영조의 비답(批答)을 들었다. 또, 사신왕래시 국경지방에서 상고(商賈)의 출입을 엄금할 것을 건의하여 영조의 윤허를 얻었다.
또, 이해에 대신(臺臣)의 직책을 다하지 못하였다 하여 집의를 사퇴하면서, 임금은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길을 열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1730년 소론 일파들이 국문을 당할 때 그의 이름이 연좌되었으므로 그뒤 오랫동안 금고(禁錮)를 당했다가, 1738년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의 건의로 해금되어, 첨지중추부사 · 오위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