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겸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형조참의, 고성군수,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광보(光甫)
오재(汚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39년(인조 17)
사망 연도
1685년(숙종 11)
본관
풍양(豊壤)
출생지
광주(廣州)
주요 관직
형조참의|고성군수|경상도관찰사
정의
조선 후기에, 형조참의, 고성군수,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광보(光甫), 호는 오재(汚齋). 광주(廣州) 출신. 조영중(趙瑩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 조익(趙翼)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조복양(趙復陽)이다. 어머니는 이경용(李景容)의 딸이다.

생애와 활동사항

1663년(현종 4) 진사가 되고, 167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대교·설서·이조좌랑·사간·응교·승지·대사성·부제학·형조참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외직으로 1681년(숙종 7) 고성군수, 1685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명가에서 태어나 문재가 있었고 처신에 청약(淸約)하여 인망이 두터웠다.

오시수(吳始壽)의 옥사 때 김수항(金壽恒)에게 오시수를 변호하다가 힐책을 당한 뒤, 김익훈(金益勳)의 남인모반사건 조작을 계기로 민정중(閔鼎重)·김석주(金錫胄)와 불화하여 더욱 입장이 난처하였다. 승지로 있을 때 왕의 명으로 송시열(宋時烈)을 찾아가 김익훈이 남인 허새(許璽)·허영(許瑛)을 이용, 반역을 꾀하게 한 사실을 알리고 일단 송시열의 동의를 구하였으나, 송시열이 그 뒤 김석주 등의 말을 듣고 김익훈을 비호하게 되자 송시열까지 의심을 하게 되었다.

이 일로 한태동(韓泰東)·유득일(兪得一)·박태유(朴泰維) 등과 더욱 정론(政論)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올린 여러 소에서 박세채(朴世采)·박태손(朴泰孫) 등을 비호하여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아버지 복양이 어려서부터 윤순거(尹舜擧) 형제와 교우했고, 특히 윤선거(尹宣擧)와는 친분이 두터워 윤선거의 상에 복(服)을 입었던 사이여서 윤선거의 아들 증(拯)과 우의가 두터웠다.

이러한 연유로 소론의 거두 중 일인이 되었다. 당시 송시열을 지지했던 김수흥(金壽興)·김수항·민정중·민유중(閔維重)·김석주·김익훈 등이 노론이 되었고, 박세채·윤증을 지지하던 한태동·박태보(朴泰輔)·오도일(吳道一)·최석정(崔錫鼎)·박태손 등이 소론이 되었다. 그의 문집인 『오재집』에는 <선부군언행총략(先府君言行總略)>과 <백씨행장(伯氏行狀)>이 실려 있어 조복양과 조지형(趙持衡)의 인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편 같은 문집에는 고산찰방으로 있을 때 올린 글 <고산찰방시공사(高山察訪時供辭)>가 있어 당시 마정(馬政)의 문제점 및 그 내용과 역승제도(驛乘制度)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교우로는 윤지선(尹趾善)·최석정 등이 있으며, 문하생으로 권구(權絿) 등이 있다.

그 밖에 오도일·한태동·남구만(南九萬) 등과도 교유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 광주(廣州)의 명고서원(明皐書院), 고성(高城)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오재집』이 있고, 편서로 『송곡연보(松谷年譜)』가 있다.

참고문헌

『현종개수실록』
『숙종실록』
『국조방목』
『동국붕당원류(東國朋黨源流)』
『청선고(淸選考)』
『당의통략(黨議通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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