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

조선시대사
개념
조선 후기의 역사적 전개를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으로 간주하고 그 이행기에 나타난 조선 유학의 새로운 학문 경향을 지칭하는 학술 용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실학은 조선 후기의 역사적 전개를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으로 간주하고 그 이행기에 나타난 조선 유학의 새로운 학문 경향을 지칭하는 학술 용어이다. 20세기 한국학계가 창출한 조선 후기 실학의 입체적 이해를 위해서는 개념, 지식, 연구에 관한 통괄적 지식이 중요하다. 실학 개념의 중층성과 실학 지식의 비정합성은 실학의 학술적 재구성을 성찰하는 출발점이다. 오늘날 실학 연구는 근대 지향에서 근대 성찰로 관심이 이동하고 있으며, 실학의 개념사와 지식사는 최근의 추세이다. 실학은 여전히 미래학이다.

정의
조선 후기의 역사적 전개를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으로 간주하고 그 이행기에 나타난 조선 유학의 새로운 학문 경향을 지칭하는 학술 용어.
내용

개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는 실학은 기본적으로 한국사 교과서 또는 개설서를 통해 전달되는 조선 후기의 특정한 사상 조류에 관한 통설적인 역사 지식이다. 그 기본적인 착상은 조선 후기 유학에서 구학문과 신학문의 대립에서 비롯된다.

조선시대 주자학이라는 구학문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아와 세계에 눈을 뜬 선각자가 현실을 개혁하려는 새로운 사상을 품고 다양한 신학문을 일으키는 데 그것이 실학이라는 내용이다. 여기에 전통과 근대의 대립이 부과되어 실학에 관한 시대적인 설명을 제공해 준다. 조선 후기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근대화론을 수용하여 조선 후기 유학의 새로운 학문 경향을 적극적으로 근대 지향으로 읽어내는 방식이다.

1959년 간행된 사회과학사서간행회의 『한국사사전』에는 「실학」 항목이 있는데, 실학에 대해 ‘이조(李朝) 국가 사회의 퇴폐에 대하여 이를 비판하고 개혁하려는 학문’이라 정의하고, ‘부패해 가던 이조 사회를 근대화하는 내재적인 계기와 사상적인 지향이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이 사전은 임진왜란 후 피폐해진 사회를 구원하려는 현실 개혁의 열망과 서양 문물과 청조 문물의 유입에 따른 학문적인 자극이 결합하여 일어난 새로운 학풍으로 실학을 보았다. 이 학풍의 주요 인물로 유형원, 이익, 정약용을 서술하였고, 주요 흐름을 현실 개혁론과 조선학 연구로 요약하였다. 이 학풍의 전성기를 영 · 정조 시기 문운(文運)의 융성기로 제시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91)과 『역사용어사전』(2015)의 「실학」 항목도 실학에 관한 사전적 지식의 습득에 도움이 된다. 전자는 개관, 연구사, 개념, 형성 배경, 사상 유형, 연구 과제와 전망 등의 항목으로 실학에 대해 폭넓게 논했고, 후자는 20세기 실학 연구의 흐름을 광복 이전과 광복 이후, 다시 광복 이후 연구의 흐름을 실학의 근대성에 대한 긍정과 부정으로 구분하여 실학을 논하였다. 한편,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학술용어』(2020)의 「실학」 항목은 실학이라는 학술 용어의 역사적 이해에 도움이 된다.

조선 후기 실학은 근대에 구성된 역사 지식이다. 이 지식의 체계적인 정립은 광복 후 한국 학계의 학술 연구에 의존하였으나, 지식 그 자체는 광복 전에 이미 선행해 있었다. 또한, 실학이라는 역사 지식이 수립되기 전에 먼저 실학이라는 근대 개념이 한국 사회에 정착하고 있었다.

20세기 한국 학계에서 산출된 실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학의 개념사, 실학의 지식사, 실학의 연구사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20세기 실학 연구는 주로 근대에 의존해 진행되었는데 근대 성찰적인 시각에서 새로운 관점과 방법의 모색이 요망된다.

개념

실학은 광복 후 한국 학계에서 조선 후기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 사용한 학술 개념어이다. 그러나 실학은 그 이전부터 사용된 오랜 전통이 있었다. 본래의 실학은 현대의 실학과 비교하면 명칭은 같아도 의미는 달랐다. 실학의 개념사에서 볼 때 조선 후기 실학을 지칭하는 학술 개념으로서의 실학은 20세기에 발생한 최근의 현상이다.

전통적으로 실학은 유학의 가르침을 밝히고 실천하는 학문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현전하는 한국 문헌에서 확인되는 실학의 첫 용례는 고려 말기 이제현충숙왕에게 올린 진언이다. 이제현은 학교 제도를 확충하면 유학을 등지고 불교를 따르거나 실학을 버리고 장구(章句)를 익히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권근도 흥학(興學)과 관련하여 실학을 말하였다. 그는 화려한 문장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육경을 읽어 도를 밝히고 인륜을 밝히는 것이 ‘유자의 실학’이라 하였다. 참다운 유학이란 사장학(詞章學)이 아니라 경학(經學)이라는 뜻이었다.

조선 초기 경학으로서의 실학이란 과거제 시행의 맥락에서 강경(講經)의 강화와 연결되었다. 과거 시험에서 강경의 강화를 통한 실학의 진작은 때로 ‘실학 급제’라는 신조어를 낳는 배경이 되었다. 이 말은 강경에 힘썼지만 실제 경문의 문리도 이해하지 못하는 과거 합격자에 대한 사회적인 조롱이었다.

성리학이 확산됨에 따라 참다운 성리학을 실학으로 지칭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주자학을 독실히 믿고 섭렵하여 실학을 전수했다는 기록이나 성리 문자를 연구해 이기론을 터득한 결과, 실학의 대의에 통달했다는 기록은 그러한 사례를 보여 준다.

성리학의 융성이 학파의 분기와 당론의 대립으로 이어지자 참다운 성리학을 회복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실학을 호명(呼名)하는 현상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성리학의 문호 분열 및 이와 연결된 당론의 치성에 직면하여 위기(爲己)의 실학을 돌아보는 용례는 성리학이 실학으로서의 면모를 잃고 있는 현실의 성찰이었다.

성리학의 참다운 실천을 위한 실학의 호명은 부단히 계속되었다. 유자라는 명색을 갖추어도 실제로 인륜의 일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실학에 점진할 수 있다는 생각, 학(學)과 사(事)가 결합해야 실학이니 독서 궁리는 물론 일용사물도 중시해야 한다는 생각은 성리학의 실천[行事]으로서 실학을 사유하는 용례를 보여 준다.

조선 후기 실학의 용법에는 성리학이 실천되지 않는 현실을 성찰하고 성리학의 본래성을 회복한다는 어감이 짙게 배어 있다. 여기에는 허(虛)와 가(假)에서 대한 비판의식도 개재해 있었다.

김낙현은 허(虛)를 앓고 있는 선비에게 실(實)이라는 약을 투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과거 시험에 매몰된 선비들, 전통을 과시하는 고가의 후손들, 성리설을 입으로나 말하는 유생들, 그저 취미에 빠져 훈고 · 사장 · 금석을 좇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었다.

홍직필은 세상에 진(眞) 도학이 사라진 결과, 평생토록 사욕과 명리에 매몰된 가(假) 도학에 기만당하는 현실의 폐해를 근심하였다. 이충익은 가(假)의 문제로서 성현을 가차해서 군자의 잘못을 수식하는 위선적인 태도, 성현의 인의를 사욕으로 가차해서 자기 소유로 삼는 사유화의 행태를 비판하였다.

조선 후기에 자주 발화된 실학이란 주로 성리학 안에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실(實)을 실현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대개 성리학자가 실학을 말하였다. 다만 강화 양명학파로 분류되는 이충익의 진가론은 근대 초기 이건방을 거쳐 정인보에게 연결되고 정인보의 실학 개념에 영향을 미쳤다.

근대에 접어들어 실학 개념에 큰 변동이 발생하였다. 개항 이후 서양 근대 신문물의 유입이 촉진되고 갑오개혁 이후 서양 근대의 분과 학문을 교수하는 신교육 제도가 들어섰다. 이를 배경으로 서양 근대의 제반 분과 학문이 신학(新學)으로 감각되어 실학의 명칭을 장악하고 종래의 성리학은 구학(舊學)이 되어 실학의 대립자로 타자화되기 시작하였다.

1900년대 한국 매체는 세계 열국의 학교에서는 농학, 상학, 이학, 화학, 광학, 의학, 기계학, 법률학, 경제학, 정치학 등 허다한 실학을 가르치고 있으나 한국의 재래 학문은 장구와 사장을 정학으로 받들고 시무와 법률에 어두워 실학에 반대되는 허학이었다고 진술하였다. 근대 서양 학문과 전통 한국 학문을 실학과 허학으로 차별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1900년대 한국의 유력한 언론인이었던 박은식은 『 한국통사』(1915)에서 조선의 도학에 실학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이 천하에서 지극히 빈약한 국가가 되었다고 서술하였다. 조선의 도학이 허를 높이고 실을 버려 정치학, 법률학, 병학, 농학, 공학, 상학, 재정학 등 실용 있는 학문을 공리라고 배척한 결과 백성은 실업이 없고 나라는 실력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실학과 허학의 대립 구도 속에 조선의 도학을 명확히 허학에 배치하였다.

장지연은 1915년 신구학을 논한 글에서 동서양 모두 고대에는 문학과 철학을 위주로 하였는데, 서양은 실용학을 강구해 근대 과학의 발전과 산업의 번창으로 이어졌고 동양은 전통 학문을 변통하지 못했음을 지적하였다. 서양에서 근대 과학과 근대 산업을 견인한 역사의 계기가 인문학에서 실용학으로의 전환임을 말한 것이다.

한국의 근대 실학은 외래 개념이었다. 중국발 실학과 일본발 실학 모두 과학을 의미하였다. 청말 재중(在中) 서양 선교사는 실학을 격치학(格致學) 또는 격치기예학(格致技藝學)으로 보고 실학이 실전된 중국과 실학이 진보한 서양을 대비시켰다. 메이지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역시 실학을 사이언스(science)로 해석하였는데, 한국 매체는 메이지 사상계의 중요한 흐름으로 후쿠자와의 실학주의에 주목하였다. 허학과 실학의 대립은 이미 메이로쿠샤의 『명육잡지(明六雜誌)』에서 나타났다.

근대 실학 개념의 유입은 신학의 본질로서 근대 서양 과학을 각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구학의 반성으로 실학의 부재를 돌아보고 구학 속에 있었던 예외적 존재를 근대 서양의 맥락에서 통찰하도록 이끌었다.

20세기 벽두 한국 사회는 조선 후기 박지원과 정약용의 학문을 기념하는 출판사업을 전개하였고, 이들의 학문은 각각 ‘시무’와 ‘경제’의 측면에서 주목되었다. 김윤식은 박지원을, 이건방은 정약용을 서양 계몽사상가 루소 · 몽테스키외와 비교하였다.

직접적으로 근대 서양과 유비(類比)하지 않더라도 조선 유학의 예외적 학자들의 학문을 근대 실학이 환기하는 분과 학문에 배치하고자 하는 의식이 성장하였다. 『서우(西友)』(서우학회)에 실린 「우리 한국의 교육 역사」에서는 조선시대 학문을 도학, 정치학, 문학으로 구분하고 정치학의 대표자로 유형원, 김육, 정약용을 예시하였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유형원, 박지원, 정약용의 정론(政論)을 말하였다.

정치학과 함께 경제학이라는 범주도 출현하였다. 『 황성신문』 논설은 정약용을 ‘경제학’ 대선생으로 표장(表章)하였다. 장지연은 「 조선유교연원」에서 유형원, 정약용, 박지원, 홍대용, 이덕무 등의 ‘경제지학’ 또는 ‘경제고거지학’을 말했고 이들의 학문을 ‘한유(漢儒) 학술’이라고 불렀다.

정치학, 경제학에 이어 조선학이 후속하였다. 최남선은 「 조선역사강화」에서 조선 후기 자아의 각성과 이에 따른 조선 연구를 특징으로 하는 ‘실학풍’의 전개에 주목하고 실학풍과 북학론으로 조선 후기 문화 진흥을 설명하였다. 양난 이후 조선에서 자아의 사상이 선명해져 조선의 본질과 실제를 밝히려는 경향이 깊어졌음을 말하였다.

문일평 역시 최남선을 이어받아 「조선 문화사의 별항」에서 조선 후기 ‘실사구시파의 학풍’을 서술하였다. 실사구시의 정신은 자아로, 실사구시의 방법은 경제로 인식하였다. 조선 후기 학인에 대해 정치와 경제에 대한 관심에 이어 자아에 대한 관심이 뒤따라 조선 후기 실학에 대한 역사 지식을 구성하게 되었음은 주목할 만하다.

정인보는 과거의 주자학과 현재의 근대학에서 몰주체적인 허학을 비판하고 양명학의 실심에 의한 주체적인 실학을 중시하였다. 그는 실학의 관점에서 근세조선학의 계보를 ‘유형원-이익-정약용’으로 구성하였다. 최익한은 조선 후기 학문 흐름으로 서학과 실학을 구별하고, 이익은 실학으로 정약용은 서학으로 보았다.

이 시기는 조선 후기 역사 지식에 적용되는 학술 개념으로서 느슨하게 실학이 출현한 시기이다. 조선 후기 새로운 학문 경향을 가리켜 실학풍이라 부르고, 이 학풍에 의해 조선 후기 학문의 계보학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나타났다.

광복 후 본격적인 실학 연구가 진행되면서 실학 개념에 대한 체계화가 일어났다. 천관우의 「반계 유형원 연구」(1949년 완성/1952년 게재)는 실학의 발생이라는 측면에서 유형원을 연구하였는데, 제5장 '실학파의 계보와 반계'에서 실학의 핵심으로 실정[자유성], 실증[과학성], 실용[현실성]을 말하고 실학의 역사적 의의를 ‘근대정신의 내재적 배반’으로 평가하였다.

천관우의 새로운 실학 이해는 실학 개념 논쟁을 촉발하였다. 한우근의 「이조 실학의 개념에 대하여」(1958)는 실학의 통시적 용례를 검토하고 조선 실학을 경학과 경세학으로 이해하였다. 전해종의 「석실학」(1959)도 실학의 통시적 용례를 검토하고 청대의 ‘ 경세치용’과 ‘ 실사구시’를 실학의 주안점으로 삼았다.

한우근의 조선 실학 이해의 핵심은 사장학에서 벗어나 경학을 지향하여 유학 본연의 수기치인의 실을 거두려는 본래적인 실학, 그리고 명말청초 중국의 ‘실학’이 명대 심학에서 청대 고증학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경세치용’을 보임에 상응하여 조선에서 나타난 ‘경세의 실학’이었다.

한우근과 전해종이 실학 개념의 역사성을 중시했다면 천관우는 당대의 실천적 역사의식에 의한 실학 개념의 학술적 재구성에 관심을 두었다. 천관우의 「한국실학사상사」(1970)는 이전의 삼실론(三實論)을 수정하여 새로운 실학 개념을 제시하였다. 즉, 실학이란 근대 의식과 민족 의식을 척도로 재구성한 조선 후기 유학의 개신(reformation)이었다.

천관우가 제안한 실학 이해의 키워드인 근대, 민족, 개신 중에서 가장 중시된 어휘는 근대였다. 광복 후 학계의 실학 연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제14권(1975)의 제목 ‘근대적 사상의 맹아’는 조선 후기 실학이라는 학술 개념이 근대사상 맹아론으로 정초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천관우의 개신유학은 철학계의 실학 개념 논의로 이어졌다. 이을호는 탈성리학 또는 탈주자학을 중시하여 실학을 ‘수기치인의 수사학적 개신유학’으로 보았다. 윤사순 역시 실학을 개신유학으로 보면서 성리학의 철학과 대립하는 실학의 철학을 입론하기 위해 박세당의 반주자학적 경학에 주목하였다.

근대화론의 퇴조와 함께 이에 속박된 실학 개념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는 근대적 실학에서 근세적 실학을 구별하여 근세적 실학이 수기의 실심과 이용후생의 실용을 모두 중시했음을 논하였다. 이는 현대문명의 반성으로서 실심실학(實心實學)의 재인식과 연결된 것이었다.

윤사순은 근대화가 초래한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한 유학사상의 현대적인 소환으로 ‘신실학(新實學)’을 제기하였다. 임형택은 서양 중심주의에 경사된 속류 실학을 불식하고 ‘신실학’을 주조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동아시아 실학’을 말하였다.

근대와 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실학은 이에 이르러 근대를 성찰하는 신실학과 민족을 넘어서는 동아시아 실학이라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였다. 현대 한국의 학술 개념으로서 실학은 본질적으로 개념의 역사성보다 개념의 실천성을 중시해 왔다. 신실학과 동아시아 실학은 한국 현대 실학 만들기의 최신 국면이다. 동시에 실학 만들기의 역사 그 자체를 성찰하는 관점도 대두하고 있다. 20세기의 실학 개념은 이제 황혼에 처해 있고,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에야 날개를 편다.

지식

조선 후기 실학은 광복 후 본격적으로 연구되었지만, 그것이 역사책에 소개되어 사회적 지식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벽두부터였다. 대한제국기 간행된 한국사 교과서는 영 · 정조 시기의 문화 융성과 학문가(學問家) 정약용의 출현에 주목하여 그것을 통사 체계의 지식으로 전하고자 하였다.

현채는 『 동국사략』(1906)에서 조선 후기 역사의 기본 독법으로 ‘당쟁과 문화’를 설정하여 영 · 정조 시기의 문화 융성을 제시하였고, 동시에 『 유년필독』(1907)에서는 조선 제일의 경제학 대가 정약용이 당대의 문명한 학문가임을 부각하였다. 박정동의 『 초등본국약사』(1909)는 영조의 치국안민과 정조 때의 문화극성과 정약용의 정치개혁 지향을 전달하였다.

영 · 정조 시기의 문화 융성과 정약용과 같은 학문가의 출현은 이후 한국 통사 체계에서 전달되는 조선 후기 실학 지식의 기본 뼈대가 되었다. 권덕규의 『조선유기』(1926) 제3편 제10장 제28절 '영정의 치와 학자의 배출'은 이 지식을 시대사의 장절로 특화한 최초의 사례이다. 황의돈의 『신편조선역사』(1923)는 「이조의 문화」에서 영 · 정조 시기의 문치로 인해 ‘조선문학의 황금시대’가 열렸고 유형원-이익-정약용의 백과학자가 ‘동양학술상 백과전서’를 산출했음을 서술하였다.

최남선의 「 조선역사강화」(1930)는 조선 후기 실학에 관한 기존의 역사 지식에 체계적인 설명을 입힌 획기적인 작품이었다. 즉, 양난 이후 조선이라는 민족적 자아에 관한 사상이 발아하여 조선의 본질과 실제를 연구하는 ‘실학풍’이 일어났고, 이것은 오랜 기간 중국의 경학과 문학을 연구했던 조선의 이전 학풍과 비교하면 상당한 변화였다.

최남선은 조선 후기 영 · 정조 시기의 문화 융성을 실학풍과 북학론으로 구성하였고, 조선시대 학술사의 전체 흐름을 유학의 교학, 실학풍의 조선학, 그리고 서학으로 제시하였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실학과 유학, 실학과 북학, 실학과 서학을 서로 학문적으로 구별하는 관점이었다. 영 · 정조 문화 융성기의 학문이라는 기존의 역사 지식이 실학풍의 조선학이라는 명확한 개념을 얻었다.

광복 후에 쏟아져 나온 한국사 개설서는 실학 지식의 구축에서 이전과 다른 태도를 보였다. 전반적으로 서양 문물과 청조 문화의 전래, 서학과 청학의 유입과 같은 외래적 요인을 강조하는 공통점을 보였다. 이는 영 · 정조 시기 문화 융성을 구성하는 조선 학인의 실학풍을 자아의 사상과 조선 연구로 요약한 최남선의 입론과 거리가 있었다.

김성칠의 『조선역사』와 『국사통론』은 천주교 유입과 청조 고증학 유입이 ‘실사구시학파(實事求是學派)’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인식하고 청학, 서학, 북학을 모두 ‘실사구시학파’의 학문에 포함시켰다. 그는 청년 학자의 북학이 ‘근세 시민사상의 맹아’이고 ‘이루어지지 못한 문화혁명의 봉화’라고 말하였다.

이인영의 『 국사요론』은 세계사적 국사관으로 민족 문화를 이해한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안고 서양 문물의 전래와 청조 고증학의 영향으로 ‘실학파’가 배출되었다고 서술하였다.

최남선 이래 조선 후기 학문의 새로운 경향을 실학풍의 대두와 번영으로 이해하는 방식이 정착했지만, 정작 그 학풍의 성격을 통찰하는 키워드가 제시되지는 못하였다. 광복 후 교과서는 실학풍의 성격에 대해 실사구시, 이용후생, 경세치용 등의 서로 다른 키워드를 제안하였다.

17세기 학풍 변천기의 조선 학문의 성격으로 서울대학교 국사연구실의 『조선사개설』(1946)은 실사구시, 이병도의 『조선사대관』(1947)은 이용후생, 이홍직 외 『국사신강』(1958)은 경세치용을 제시하였다.

이기백의 『국사신론』(1961)은 처음으로 실사구시의 학문, 경세치용의 학문, 이용후생의 학문을 모두 실학이라고 말하였다. 기존 개설서의 상이한 실학 이해를 막고 이를 통합한 것이다. 이우성의 「18세기 서울의 도시적 양상」(1963)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학문 대신 학파를 말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은 경세치용학파, 이용후생학파, 실사구시학파로 구성되어 있다는 입론이다. 그는 「실학연구입문서설」(1973)에서 경세치용파, 이용후생파, 실사구시파로 표현을 다듬었다.

『국사신론』은 광복 후 조선 후기 실학에 관한 역사 지식을 체계화한 최초의 개설서였다. ‘실학의 발생’, ‘실학의 발전’, ‘실학의 극성’을 배치하여 조선 후기 새로운 학문을 직접적으로 ‘실학’이라 거명하였고 그것의 본질과 성격, 그리고 전개 과정을 서술하였다. 이에 따르면 조선 국가의 사회 위기를 배경으로 철저한 제도개혁을 부르짖는 새로운 학문이 곧 실학이고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중심으로 실증적 연구 방법을 사용하는 학문이 곧 실학이다.

『국사신론』은 실학 이해의 주안점을 외래 학문에 두지는 않았다. 『조선사개설』도 실학에 대하여 ‘사회 개혁운동에 대한 이론’의 측면을 중시했지만, 『국사신론』 역시 무엇보다 현실 개혁을 위한 학문 프로젝트로서 실학을 응시하였다. 실학 이해를 위한 일의적 키워드는 외래 학문보다는 현실 개혁이라는 뜻이었다.

실학의 현실 개혁론에 관한 이해가 진전됨에 따라 이는 농업 중심과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으로 구체화되었다. 한우근의 『한국통사』(1970)는 「실학사상의 발전」에 실학의 발흥, 중농적 제도개혁, 중상론과 기술학, 국학의 발달 등을 배치하였다. 이것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14[조선- 근대적 사상의 맹아, 1975]에 그대로 수용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 35(1998)의 실학 지식은 이로부터 달라졌다. 이 책은 조선 후기의 학문을 크게 실학, 국학, 과학으로 나누고 이 가운데 실학에 대해서는 성립, 전개, 연구로 삼별하여 관련 내용을 서술하였다.

구편 『한국사』 14에서 실학의 하위 범주로 소속시킨 국학이 실학의 외부로 독립하고 실학이 거의 현실 개혁론으로 남은 것이 큰 변화이다. 다만, 그 현실개혁론에 대해 『한국사』 35는 탈성리학적 왕도정치론으로 『한국사』 31은 반주자학적 근대화론으로 서로 다른 해석을 가해서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다.

본디 광복 전 최남선은 영정 시기 문화 융성을 구성하는 실학풍의 조선학이라는 지식을 창안하였다. 광복 후 유홍렬은 『한국문화사』(1950)에서 조선 후기 실학과 국학을 병거(竝擧)했는데 여기서 국학은 국고학이었다.

장도빈은 『국사개설』(1954)에서 「국학의 부진」에 실학을 배치하고는 조선의 실학이 일본의 국학과 닮지 못했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구편 『한국사』 14에서 실학 안에 국학을 포함한 것이나 신편 『한국사』 35에서 실학 밖으로 국학을 분리한 것은 실학-국학 관계의 혼란스러움을 반영한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실학 지식도 이와 비슷한 변화를 겪었다. 제3차 교육과정의 교과서는 실학 안에 농업 중심 개혁, 상공업 중심 개혁, 국학, 자연과학을 두었으나 제6차 교육과정에서는 실학이 국학 및 자연과학과 분리되어 온전히 사회개혁론으로 남는 변화가 일어났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의 변화와 상통하는 현상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 지식의 유동성과 가변성은 실학의 시기와 유파의 구분에서도 발견된다. 정인보는 조선 근고의 학술사를 종관하면, 유형원이 일조(一祖)이고 이익이 이조(二祖)이고 정약용이 삼조(三祖)가 된다고 인식하였다. 최남선은 「조선역사강화」에서 실학풍의 선구자[유형원], 실학풍의 확산[이익], 실학풍의 최고조[정약용]로 단락을 매겼다.

본래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은 1900년대에 성리학과 구별되는 정치경제학의 학인으로 인식되었다. 1920년대에 황의돈의 『신편조선역사』에서는 백과전서를 산출한 백과학자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학문적 동류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정인보와 최남선은 실학의 계보학에서 단계론을 창출한 것이다.

실학의 계보학에서 유형원, 이익, 정약용은 특정한 단계를 상징한다. 광복 후 천관우는 「반계 유형원 연구」에서 실학의 단계를 준비기, 맹아기, 전성기로 구분하고 유형원[학], 이익[학파], 정약용[시대사조]으로의 실학 발달을 서술하였다. 이것은 진단학회 『한국사』에 ‘실사구시의 학풍’이라는 이름으로 그대로 수용되었다.

김용덕은 실학파를 전기 실학파[이이 · 조헌]와 후기 실학파로 구별하고, 다시 후기 실학파를 경세치용학파[이익]와 이용후생학파[박지원]로 분류하였다. 이우성은 실학파를 경세치용파[이익], 이용후생파[박지원], 실사구시파[김정희]로 분류하였다. 전해종은 경세치용[이이 · 유형원], 실사구시[이익 · 정약용], 이용후생[박지원]으로 분류하였다. 실학 계보 삼분법의 흐름이었다.

그 밖에 김양선은 실학의 발전 단계를 서학의 관점에서 초창기, 발전기, 융성기, 쇠퇴기로 구분하였다. 조기준은 봉건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실학, 봉건성이 해체되는 과도기의 실학, 신흥시민층을 대변하는 실학, 개화사상으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실학으로 구분하였다.

실학 계보 이분법의 흐름도 존재하였다. 앞에서 거론한 『조선사개설』과 『조선사대관』은 본래 영 · 정조 시기 문화 융성에 배치되던 실학을 서로 다른 장절로 나누어 각각 학풍의 변천기와 영 · 정조 시기를 분리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 실학 지식의 이원화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17세기 실학과 18세기 실학의 이분법적 이해는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최남선과 정인보의 실학 계보 단계론이 유형원-이익-정약용이었음을 고려하면, 실학 계보 이분법에서 위치가 불안정한 인물이 이익이었다. 『조선사개설』은 이익을 본격 실학[영 · 정조 시기]에 배치하였으나, 『조선사대관』은 유형원과 이익을 한 묶음으로 초기 실학[학풍 변천기]에 배치하였다. 천관우의 맹아기와 전성기, 이기백의 발전기와 극성기 역시 동일한 태도를 보였다. 이우성은 「실학연구서설」에서 실학을 18세기 영 · 정시대 이후의 서울과 근기학인(近畿學人)으로 한정하되 이익을 포함시켰다.

최초 실학 지식의 출발은 영 · 정조 시기 문화 융성이었으니 실학 계보 이분법에서 본격 실학의 핵심 테마가 영 · 정조의 문화사업과 청조 고증학으로 상정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실학의 정의 및 발생과 직결되어 있는 초기 실학인데, 이에 대하여 그것의 본질적 측면을 조선학, 서학, 유학으로 제시하는 상이한 관점이 각립하였다.

김득황의 『한국사상의 전개』(1950)는 두 차례 호란과 명청 교체에 따른 ‘조선아(朝鮮我)’ 의식이 형성하여 조선학이 태동하고 조선미가 출현함을 말하였다. 유홍렬의 『조선문화사』(1950)는 실학파의 신문화 건설운동의 동력이 명말 이래 서양문물의 전래에 따른 인생관과 세계관의 확대임을 말하였다. 현상윤의 『조선유학사』(1949)는 조선 후기 실학파의 ‘경국제민(經國濟民)의 실학’의 본질을 공맹의 왕도정치 정신이라 말하였다.

초기 실학에 관한 지식의 복잡성을 더해주는 사태는 ‘경세치용’이라는 개념이다. 한우근은 일본의 야마이노유[山井湧]의 명말청초 경세치용의 학문에 대한 연구를 유념해 조선 실학의 통시적 흐름에서 수기치인의 실학[주자학]과 실사구시의 실학[고증학] 사이에 경세치용의 실학을 상정하였다. 전해종은 청학의 핵심을 경세치용과 실사구시로 대별하고, 조선의 실학 계보학에서 경세치용의 핵심 인물로 이이와 유형원을 중시하였고, 청학과 다른 조선 특유의 실학이 이용후생임을 논하였다.

초기 실학과 본격 실학의 실학 단계론, 그리고 경세치용 · 이용후생 · 실사구시의 실학 유파론은 전체 단계와 유파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단일한 정체성을 갖는 학문 사조로서 실학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회의를 유발하였다. 지두환의 「조선 후기 실학 연구의 문제점과 방향」(1987)은 ‘주자성리학-조선성리학-북학’의 구도에서 초기 실학 단계와 경세치용 유파[조선성리학] 및 본격 실학 단계와 이용후생 유파[북학] 사이를 갈라서 후자를 실학으로 이해하는 정리 방안을 제안하였다.

실학 지식의 체계화 작업은 전체 실학을 구성하는 개별 실학자의 범위를 정하는 문제와도 연결되었다. 역사학계의 『실학연구입문』(1973)은 유형원, 이익, 이중환, 유수원, 박지원, 우하영, 박제가, 정약용, 최한기 9인의 생애와 사상을 논하고 핵심 자료를 소개하였다.

대중적인 교양서로 출판된 『실학의 개척자 10인』(1974)은 유형원, 이익, 안정복,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서유구, 정약용, 김정희, 최한기 등 10인의 실학을 소개하였다. 유형원, 이익,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최한기 등이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철학계의 경우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한국연구실의 『실학사상의 탐구』(1974)는 박세당, 신후담, 정약용, 이규경, 최한기 등의 철학사상을 논하였다. 한국철학회의 『한국철학사』(1987)는 이수광, 유형원, 박세당, 이익, 안정복,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김정희, 최한기, 이제마 등의 철학사상을 논하였다.

한국철학사연구회의 『한국실학사상사』(2000)는 한백겸, 이수광, 김육, 박세당, 유형원, 이익, 안정복, 김석문, 황윤석,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정약용, 김정희, 최한기, 이규경, 박규수 등의 철학사상을 논하였다. 박세당, 정약용, 최한기 등이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조선 후기 실학이라는 역사 지식의 정합성이 취약했던 근본적 원인은 실학 지식 형성기의 상이한 두 관심 때문이었다. 원초적으로 실학 지식을 구축해온 양대 축은 곧 ‘유형원-이익-정약용’의 정치경제학을 성리학과 구별하고자 하는 관심, 그리고 영 · 정조 시기의 문화 융성을 조선의 성리학 전통과 구별하고자 하는 관심이었다.

성리학과 대립하는 학문을 사회경제와 문화라는 두 관점에서 상정하고 여기에 조선학, 서학, 청학 등이 가세하면서 실학자의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다. 급기야 『실학연구논저목록』(2005)에는 한국 실학자 56인이, 『동아시아 실학사상가 99인』(2015)에는 한중일 실학자 99인이 선별되었다.

실학의 지식을 구성하는 키워드는 변화해 왔으며 실학의 유파, 단계, 범위에 대한 통일된 지식은 정립되어 있지 않다.

연구

조선 후기 실학에 대한 학술 연구는 20세기의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먼저 정인보는 조선시대 학술사 · 사상사 작업으로 「조선고전해제」와 「양명학연론」을 연재하였다. 정약용 서거 100주년 기념으로 조선학운동이 일어나 『 여유당전서』가 출판되자, 최익한은 「여유당전서를 독함」을 장기간 연재하면서 실학에 관한 학술 연구를 진전시켰고 광복 후 북한에서 『실학파와 정다산』(1955)을 출간하였다.

정인보와 문일평의 영향을 받은 홍이섭은 광복 전에 『 조선과학사』를 지어 조선 후기 ‘실증학파’에 관해 서술하였고, 광복 후 남한에서 『정약용의 정치경제사상연구』(1959)를 출간하였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사학자의 실학 연구도 있었다.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조선 후기의 학풍 변천을 처음으로 논했고,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鄰]는 청학이 조선에 유입되어 실사구시의 신학풍을 일으켰음을 논했으며, 야마구치 마사유키[山口正之]는 청학에 부수된 서학이 조선의 학술을 혁신하는 기운을 일으켰음을 논하였다. 이들 연구는 대체로 실학 형성 배경으로 청학과 서학의 외래 요인을 강조하는 관점을 보였고, 이러한 관점이 광복 후 한국사 개설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인 사학자의 본격적인 실학 연구는 광복 이후에 착수되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트리오 유형원, 이익, 정약용 중에서 유형원 연구는 천관우의 「반계 유형원 연구」(1952)에서 시작하였고, 이익 연구는 한우근의 「성호 이익 연구의 일단」(1954)에서 시작하였다. 홍이섭의 『정약용의 정치경제사상 연구』(1959)는 한국 학계 최초의 정약용 연구서였다.

실학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개념 논쟁이 일어났다. 1958년 10월 역사학회의 공개토론회는 천관우의 ‘자유 · 과학 · 현실’이라는 현대적 실학 기준에 대한 한우근의 반론이었다. 한우근은 실학 개념의 통시적 흐름과 국면별 변화에 주목하여 조선 후기 실학에서 명말청초 단계의 경세치용의 실학과 상응하는 역사적 성격을 통찰하였다. 천관우와 한우근의 차이는 실학 개념의 학술적 구성을 지향하느냐 역사적 이해를 중시하느냐에 있었다.

실학 개념과 함께 실학의 성격에 대한 이해를 놓고 상이한 견해가 일어났다. 실학에서 근대정신의 내재성이나 근대사상의 계기를 인정하면서도 봉건적이고 보수적인 성격의 혼재나 병존을 인정하는 관점이 있는가 하면 봉건적인 개량주의를 넘어서는 근대정신이나 봉건사회에 반항하는 근대사상으로 실학을 높이 평가하는 관점도 있었다.

김용섭의 「최근의 실학 연구에 대하여」(1962)는 광복 후 한국 학계의 초기 실학 연구를 처음으로 논평했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가 있다. 이에 따르면 초기 연구는 실학자 개개인의 사상 내용을 실증적으로 분석한 개별 연구에 머물러 있으며, 실학 전체에 대한 통괄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이론적이고 분석적인 접근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김용섭은 이 글에서 실학 형성의 내부적 요인을 강조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이를 위해 실학과 조선 사회경제 현상의 관계, 실학과 조선 주자학의 관계에 유념할 것을 제안하였다. 아울러 실학의 역사적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 유교 국가에서 정치적 유교주의와 실학사상의 근본적 차이점은 무엇인지 봉건사회 붕괴의 역사적 진행에서 실학파의 역사의식은 무엇인지 고찰할 것을 제안하였다.

1960년대는 민족과 근대의 양대 가치가 분출하는 시기였다. 이우성은 한국사학계가 이 시기 민족주체의식론과 근대화론을 수용해 역사학의 명제로 삼았다고 말하였다. 박종홍은 「한국에 있어서의 근대적인 사상의 추이」(1964)에서 조선 후기 실학자의 근대 과학기술 섭취와 민족적 주체의식의 앙양을 거론하였다.

천관우는 『한국문화사대계』 제6권 「한국실학사상사」(1970)에서 조선 후기 실학은 근대의식과 민족의식을 척도로 재구성된 개신유학이라고 정의하였다. 김양선의 「한국실학발전사」도 실학사상의 발생 요인과 발전 과정을 서학 중심으로 간략히 체계화하였다.

실학사상 연구는 조선 사회경제사상 연구로 성장하였다. 조기준은 일찍이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사회경제적 배경을 반영하는 사상으로 간주하고 사회경제적 배경에서 실학사상의 체계화 작업을 강조하였다.

조선 후기 농업, 상업, 수공업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어 김용섭의 『조선 후기 농업사 연구』(1970), 강만길의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1973), 송찬식의 『이조 후기 수공업에 관한 연구』(1973)가 쏟아져 나왔다. 이는 내재적 발전론의 시각에서 조선 후기의 새로운 역사상을 제공했고, 사회경제사의 시각에서 실학 연구를 촉진하였다.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소의 『한국사상대계』(1976) ‘사회경제사상편’은 실학의 사회경제사상에 관한 연구의 총집이라 할 만한 문헌이었다. 이 문헌은 총론으로 이우성의 「한국 사회경제사상 서설」, 한영우의 「조선 전기 성리학파의 사회경제사상」, 조기준의 「실학의 전개와 사회경제적 인식」, 김용덕의 「실학파의 사회경제사상」이 실렸다.

각론으로 신용하의 토지개혁사상, 김용섭의 농업개혁론, 강만길의 상업 · 교역론, 유승주의 광업정책론, 김윤곤의 재정개혁론, 송찬식의 화폐유통론에 관한 논문이 실렸다. 이것은 광복 후 역사학계 실학 연구의 기념비적인 성과였다.

1970년대는 실학 연구의 가시적인 성과가 산출되는 시기였다. 역사학계의 『실학연구입문』(1973), 철학계의 『실학사상의 탐구』(1974)와 『실학논총』(1975)이 출판되었다. 『실학논총』(1975)에는 실학 개념에 관한 박종홍 · 이우성 · 이을호 · 천관우 4인의 좌담회 기록이 실려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14(1975)에는 ‘Ⅱ. 실학사상의 발전’ 안에 김영호의 「실학사상의 발흥」, 이재룡의 「중농적 제도개편론의 대두」, 김용덕의 「중상론과 기술학의 도입론」, 황원구의 「국학의 발달」이 수록되었다.

한국사상연구회의 『한국사상총서』Ⅰ · Ⅱ · Ⅲ(1973)은 박종홍의 「한국사상연구의 구상」과 홍이섭의 「한국사회사상사의 방법」을 필두로 한국사상사의 반성과 주체의 재발견을 논하고 있는데, 여기에 실학자로 분류되는 박지원 · 박제가 · 정약용에 관한 논고가 수록되었다. 조지훈은 ‘실학운동과 근대사상의 여명’에 관해 서술하였다.

『한국사상의 심층연구』(1982)는 한국사상사를 원시사상, 불교사상, 유교사상, 실학사상으로 구획해 일반 독자에게 전달한 교양서였다. 이 책 제4부 ‘실학사상’ 편에는 김영호의 「실학의 개신유학적 구조」, 정창렬의 「실학사상연구의 쟁점과 과제」, 김한식의 「실학과 민족주체의 논리」, 박충석의 「실학사상에서의 민본주의」, 신용하의 「실학파의 토지개혁사상」, 강만길의 「실학파의 상공업 발전론」, 박성래의 「실학파의 과학사상」, 윤사순의 「실학의 발흥과 사상사적 배경」 등이 있다.

정창렬의 글에는 1970년대 실학 연구의 성과에 대한 평가가 담겨 있다. 즉 ‘연구사적으로는 제국주의 사학의 실학연구를 정면에서 부정 비판하고, 1950년대의 실학 연구를 비판 반성하며, 1930년대 민족사학의 실학 연구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위치에서 1970년대의 실학 연구가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그는 실학 연구의 과제를 제시하였다. 그것은 종래의 실학사상 연구가 주자학 이념에 대한 충분한 연구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 사회경제사상 연구에 치우치고 실학의 정치사상이나 민중 인식에 대한 관심이 약했다는 점, 실학의 철학과 실학의 역사의식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다는 점을 성찰한 것이었다.

김영호의 글도 실학 연구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실학자의 과잉 발굴로 주자학과 실학의 구별이 없어졌다는 것, 실학의 상한선과 하한선을 확대하여 실학이 유학사의 문맥에서 자기 위치를 상실했다는 것, 근대적 관점의 과잉 해석으로 실학의 무개념화 현상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실학 연구에 대한 반성과 제언은 「한국실학의 반성과 전망」[1985, 윤사순 · 이을호 · 정석종 · 정창렬 4인 좌담회 기록]에서 다시 논의되었다. 정석종은 조선 후기 실학의 흐름에 앞서 조선 후기 사상사의 전반적 흐름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점, 실학사상의 사회경제적 측면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경학적 측면이 소홀하다는 점, 조선학운동 이전 애국계몽운동 시기 실학 연구의 역사적 의미를 본격적으로 규명해야 한다는 점, 실학자의 저작을 다시 정리해서 새롭게 체계화해야 한다는 점, 실학사상의 기본정신을 계승해서 현재의 사회 모순에 대해 발언해야 한다는 점을 제언하였다.

『다산경학사상연구』(1966)를 필두로 경학 중심의 실학 연구를 추구한 이을호는 좌담회에서 실학은 아직 미래학이기 때문에 실학을 처음부터 역사학계의 고정된 역사상으로 전제하지 말고 실학으로 분류되는 인물의 사상 연구를 심화할 것을 주문하였다.

윤사순은 성리학의 발전적인 변화는 실학과 성리학의 관계에서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지 양자의 구분 방식에 대해 고찰하고 청학, 서학, 양명학과 실학의 관계를 폭넓게 고찰할 것을 제언(提言)하였다.

1980년대는 실학 연구의 반성이 분출하는 시기였고, 특히 1987년에 이와 같은 논의가 집중되었다.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제20회 실학공개강좌 종합토론(1987)은 20년간 진행된 이 강좌를 결산하는 뜻깊은 자리였는데, 실학 연구의 방향을 둘러싸고 이견이 엇갈렸다.

원유한은 실학 연구가 실학자의 실학에만 매몰되어 실학자의 진보성만 부각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화폐 · 광업 부문의 경제사상에서 실학자 정약용의 보수적 성격과 국가 관료 서영보의 진보적 성격에서 보듯 이는 사실과 들어맞지 않으니, 실학자 계보에만 국한되는 폐쇄적인 태도를 넘어 너른 범위에서 실학을 연구할 것을 주장하였다.

반면 김용섭은 실학이란 조선 후기 사회에서 지주적 코스와 농민적 코스의 근대화 방략과 연결되는 중세사회 해체기의 역사적 문제로 접근해야지 단지 조선 후기 사상계의 동향으로만 이해할 문제는 아니므로 기존의 실학자 중심의 실학 연구가 여전히 유효함을 주장하였다. 실학자의 토지 개혁론이야말로 정부 정책과 차별되는 핵심적인 사회 개혁론으로 농민적 코스의 근대 지향성이 여기에 내재해 있음을 논하였다.

이원순은 역사 교육에서 실학의 역사상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이해되고 있고, 조선 후기 학문의 주류가 성리학이었음이 경시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무엇보다 1960년대 이래 민족사의 내재적 계기만 강조하는 내재론적 연구 풍토 때문에 외래적 계기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경향이 강했음을 비판하였다.

이을호는 실학이 구체적인 분석 개념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하고, 실학 연구에서 실학 개념은 ‘허상’이니 허상을 실상화할 수 있는 구체적 키워드를 발굴할 것을 제안하였다.

『한국중세사회 해체기의 제문제』(1987)에 수록된 김현영의 「‘실학’ 연구의 반성과 전망」은 실학 연구사를 발생[1930 · 1940년대], 전개[1950 · 1960년대], 심화[1970 · 1980년대]로 검토하고 그 쟁점으로 개념과 성격, 범위와 유파, 근대사상과의 연관관계를 정리하였다. 실학의 서로 다른 유파를 실학으로 포괄하기에는 너무 사상의 차이가 크다는 점을 지적하였고, 향후 실학을 조선 후기 사상사 속에서 발전적으로 해소하여 조선 후기 정치사상, 경제사상, 사회사상으로 다룰 것을 제언하였다.

지두환의 「조선 후기 실학연구의 문제점과 방향」(1987)은 1960년대 · 1970년대 실학 연구가 조선 후기 사회경제사 연구에 보조를 같이하면서 근대사상의 맹아를 찾으려 했으나. 조선 후기 성리학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있고 조선 후기 농업 사회의 성리학적 개혁론과 상공업 사회를 지향하는 북학사상(北學思想)의 개혁론을 동일하게 근대지향적인 실학으로 규정하는 오류를 범했음을 비판하고 실학을 후자로 한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실학 연구의 반성과 문제점이 표방되는 1980년대는 실학 연구의 전환기였다. 이우성은 1970년대에는 식민사관의 극복과 자본주의 맹아론과 연계되어 실학 연구의 황금기를 누렸으나, 1980년대 중후반부터 물질지상주의 · 경제제일주의의 폐해로 인해 학계의 관심이 윤리 · 철학 쪽으로 기울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지난 실학 연구가 현재성을 잃어가는 이 시기가 새롭게 실학의 방향을 설정해야 하는 전환기라고 인식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1980년대 이후 조선시대 사상사 연구의 성장에 따라 실학 연구의 중심이 사회경제사에서 사상사로 이동하고 있었다. 먼저 조선시대 사상사를 통찰하는 인식틀이 제출되었다. 최완수의 ‘주자성리학-조선성리학-북학’의 인식틀이나 조광의 ‘정학-실학-사학’의 인식틀이 조선 후기 사상사의 일부로서 실학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하였다. 금장태의 『동서교섭과 근대한국사상』(1984)은 유학과 서학의 관계에서 조선 후기 사상사의 전개와 그 근대적 전환을 논하였다.

주자학에서 실학으로의 사상 내재적인 변용을 설명하는 연구도 대두하였다. 일찍이 정창렬은 김용섭의 주자학-실학 이해가 주자학으로부터 실학으로의 전환 계기를 사회변동에서 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사상사적 설명을 요청하였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일본정치사상사연구』와 연결된 박충석의 『한국정치사상사』(1982)는 조선 주자학, 실학사상, 개화사상의 흐름을 사상 내재적인 변용과 극복 과정으로 이해하는 독법을 제공하였다.

1990년대는 바야흐로 사상사의 시기였다. 금장태의 『한국실학사상연구」(1987)와 한국사상사연구회의 『실학의 철학』(1996), 정병련의 『다산사서학연구』(1994) 이지형의 『다산경학연구』(1996)가 출간되어 실학의 철학, 실학의 경학에 관한 이해를 추구하였다. 아울러 유봉학의 『연암일파 북학사상 연구』(1995)와 김문식의 『조선 후기경학사상연구』(1996)가 출간되어 성리학과 실학의 대립이라는 논점에서 벗어나 성리학과 북학, 청학과 다산 경학이라는 사상사의 문맥을 복원하였다.

도널드 베이커의 『조선 후기 유교와 천주교의 대립』(1997)은 조선 신유학의 도덕과 서양 천주교의 진리의 대립을 통찰하였다. 김태영의 『실학의 국가개혁론』(1998)은 실학이란 근대 지향과 무관한 전근대 유학 전통의 이상적인 왕정론임을 논하였다. 고영진의 『조선시대 사상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1999)는 조선 사상사의 전개를 성리학 중심으로 이해하고 실학을 후기 국면에 배치하였다.

1990년대 실학 연구에서 기억할 것은 동아시아 실학의 출발이다. 성균관대 동아시아 실학 국제학술회의 「동아시아 삼국에 있어서의 실학사상의 전개」(1990)를 계기로 한중일 삼국은 실학 연구회를 설립하고 학술 교류와 연구 협력에 노력하였다.

『한중실학사연구』(1998)는 그 결실이다. 정창렬의 「한국 사회경제사와 실학」을 위시해 한국 8편, 신관졔의 「명청 실학사조와 그 현실 의의」를 위시해 중국 11편이 수록되었다. 이에 앞서 일본과 중국은 『일중실학사연구(日中實學史硏究)』(1991)와 『중일실학사연구(中日實學史硏究)』(1992)를 출간하였다. 미나모토 료엔[源了圓]의 「개명사상으로서의 실학」을 위시해 일본 9편, 거롱진[葛榮晉]의 「중국 실학 개론」을 위시해 중국 8편이 수록되었다.

동아시아 실학 학술 교류에서 중국 측의 거롱진은 『중국실학사상사(中國實學思想史)』[1994, 북송청말]와 『한국실학사상사(韓國實學思想史)』[2002, 이황 · 조식 · 이이박규수 · 최한기 · 남병철]의 주편을 담당하였다. 중국 측의 펑톈위[馮天瑜]는 『만청경세실학(晩淸經世實學)』(2002)의 공저자였다.

일본 측의 미나모토 료엔의 『도쿠가와 시대의 철학사상』(2000)과 오가와 하루히사의 『한국실학과 일본』(1995)이 한국에서 출간된 시기도 이 무렵이었다. 오가와는 근세의 실심실학 개념, 그리고 한일 실학 비교에 관심을 기울였다.

한국 측의 하우봉은 조선 후기 실학과 일본 근세 고학의 비교를 시론하였다. 그 밖에 금장태의 『다산실학탐구』(2001)는 대진(戴震)의 기학과 정약용의 실학, 이토 진사이[伊藤仁齋]의 고학과 정약용의 실학을 비교하였다.

2000년대 이후 실학 연구의 방향으로 신실학과 동아시아 실학이 주목받고 있다. 이미 한국에서 윤사순은 현대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한 유학 윤리사상의 현대적 변환으로 신실학을 말하였다. 임형택은 거롱진의 신실학에 찬동하면서 서구 근대의 발본적 성찰로서 ‘동아시아적 시각’의 동아시아 신실학을 강조하였다.

『동아시아 실학, 그 의미와 발전』(2012)에는 임형택의 동아시아 실학, 거롱진의 신실학, 오가와 하루히사의 실심실학 등에 관한 논고가 기조적인 위치에 있다. 이봉규는 근대론에서 벗어난 유교사적 맥락에서 동아시아 실학의 흐름을 지역적으로 분별하고 실학사상에 내재한 인륜 이론의 인류사적 재성찰을 요청하였다.

2000년대 실학 연구의 또 다른 중요한 흐름은 실학 연구 전통의 정리이다.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은 ‘연세 실학’을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연세실학강좌-실학공개강좌』 Ⅰ · Ⅱ(2003)는 실학공개강좌(1967~1987)의 발표문과 제20회 실학공개강좌 종합토론을 수합하였다. 『연세실학강좌-실학의 정치경제학』 Ⅲ · Ⅳ는 『동방학지』 실학 논문을 간추려 ‘실학의 사상적 원류’, ‘실학의 정치사상과 개혁론’, ‘실학의 사회경제사상과 개혁론’, ‘조선 말기 실학의 계승문제와 근대개혁론’으로 구분하였다.

『한국실학사상연구』(2006)는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에서 기왕의 실학 연구의 종합과 새로운 창조적 연구의 결합을 목적으로 기획하였다. 각각 ‘역사 · 철학편’, ‘정치경제학편’, ‘어문학 · 예술편’, ‘과학기술편’으로 구획하였고, 각 편의 총설로 이봉규의 「21세기 실학 연구의 문법」, 정호훈의 「조선 후기 실학연구의 동향과 정치경제학」, 김영봉의 「어문학 · 예술 분야에 나타난 실학사상의 검증」, 구만옥의 「조선 후기 과학기술사 연구와 ‘실학’」이 수록되었다. 이봉규의 총설은 학술적으로 구성된 실학 개념의 합리성을 판단하는 문제의 성찰을 포함한다.

실학의 정치사상 연구서로 김준석의 『조선 후기 정치사상사 연구』(2003), 정호훈의 『조선 후기 정치사상 연구』(2004)가 출간되었다. 주자학 이념과 실학사상의 대립이라는 김용섭의 역사철학을 계술하여 전자는 노론 정통주자학파 대 남인 고전유학파 · 소론 반주자학파의 대립을, 후자는 노론 주자학 절대주의와 대립하는 북인계 남인의 개혁론을 논하였다.

한국사연구회의 『한국실학의 새로운 모색』(2001)은 21세기를 맞이해 조선 후기 실학에 뒤이을 새로운 근대 실학을 모색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출간되었다. 원유한의 「한국실학 이해시각 확대를 위한 시론」, 이영훈의 「조선 후기 사회변동과 실학」, 임병훈의 「조선 후기 성리학과 실학」, 하우봉의 「조선 후기 실학파의 대외인식」, 한형조의 「실학의 철학」 등이 수록되었다.

이 책의 공동 저자 원유한은 『조선 후기 실학의 생성 · 발전 연구』(2003)를 출간해 상업과 화폐의 측면에서 조선 전기 개경학과 조선 후기 실학, 조선 말기 개화사상에 관한 통괄적인 이해를 구축하였다.

한림대학교 한국학연구소의 『다시, 실학이란 무엇인가』(2007)는 한영우의 「‘실학’ 연구의 어제와 오늘」을 위시하여, 실학의 정치사상(정호훈), 경화사족의 실학(유봉학), 경세학적 경학(김문식), 자연 인식과 실학(구만옥), 지리학과 실학(배우성), 도시경제와 지식세계(고동환)에 관한 논고가 수록되었다.

한영우는 총론에서 '실학'이란 실용적 성리학이고, 구체적으로 서울의 육경고학(六經古學)과 북학이 실학이며, 탈근대의 생명과 평화에서 실학을 다시 보자고 제언하였다. 그 밖에 『한국사시민강좌』 48집(2011)의 특집 ‘한국 실학 연구 80년’도 학계의 실학 연구를 돌아보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편, 실학을 보는 미국 학계의 관점은 한국 학계와 상당한 시각 차이가 있었다. 제임스 팔레의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2008)의 근본 취지는 유형원의 개혁사상을 중국의 유학 고전, 조선의 유교 체제, 동시대 관료학자의 개혁론과의 관계 속에서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학 전통 속의 개혁론이라는 뜻이었다. 이에 대해 정호훈(2015)은 실학사상의 유학 전통 환원론을 경계하고, 유형원을 17세기 남인 정치사상의 맥락에서 독해할 것을 주문하였다.

2010년 전후부터 실학의 개념적 존재와 개념사에 관한 연구가 활성화되었다. 먼저 개념적 존재에 관한 연구 주제로는 실천학으로서의 실학(조성환, 2013), 실천윤리학과 실학(도널드 베이커, 2009), 양명학의 실심실학(정인재, 2009), 성리학의 심학과 실학(김경호, 2014), 그리고 식민지 근대성의 실학(권순철, 2005), 근대 초기의 실학(노관범, 2018), 보편사적 근세 실학(이헌창, 2018), 시무개혁론으로서의 실학(김태웅, 2021) 등이 있다.

실학의 개념사에 관한 연구 주제로는 실학의 용법(이경구, 2012, 2020: 강지은, 2019), 대한제국기의 실학 개념(노관범, 2013), 이용후생의 용법(이경구, 2012: 노관범,2020) 등이 있다. 노관범(2013)은 대한제국기의 실학 개념이 신교육과 신학문의 영역에서 격치학과 실업학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 분과 학문이었음을 논구하여 실학에 관한 근대의식을 실증하였다.

실학의 지식사도 새로운 연구 주제로 부상하고 있다. 본래 실학 연구에 관한 지식은 일반적인 연구사 정리의 형식으로 축적되어 오고 있었다. 김용섭(1962), 정재정(1985), 김현영(1987), 황원구(1988), 조광(1992, 2004), 원유한(1998), 정병련(1999), 조성을(2002, 2005), 이봉규(2006, 2017), 정호훈(2009, 2019), 백민정(2011) 등의 논고가 그러하다. 이태훈의 『실학 담론에 대한 지식사회학적 고찰』(2004)은 지식사회학의 관점에서 20세기 한국 학계의 실학 지식 발명을 비판적으로 논구하였다.

실학의 지식사 연구는 달리 말하면 실학 지식의 독법을 제출하는 것이다. 정종현의 「‘다산’의 초상과 남북한의 ‘실학’ 전유」(2015)는 최익한과 홍이섭이 남북한의 체제에서 정약용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를 얻는 맥락을 지식의 전유라는 관점에서 설명하였다. 노관범의 「한국 통사로 보는 ‘실학’의 지식사 시론」(2019)은 20세기 초중반 한국사 통사 저술에서 실학 지식의 통시적 변화를 지식 형태학의 키워드라는 관점에서 검토하였다.

이봉규의 「초기 실학 연구의 학술사적 의의」(2020)는 학술사의 관점에서 부국와 안민, 양명학, 예학 등의 토픽을 통해 초기 연구가 직조한 실학 지식의 비균질성을 드러냈다. 허태용의 「‘성리학 대 실학’이라는 사상사 구도의 기원과 전개」(2021)는 실학 지식의 구성에 작용하는 ‘성리학 대 실학’이라는 학술 관념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였다.

개념사와 지식사는 실학 연구의 근본적인 성찰에 기여하고 있으며 이로부터 관성적인 사상사 연구의 혁신이 기대된다.

끝으로 실학 관련 기관의 설립이 실학 연구에 기여하고 있음을 부기한다. 한국실학학회의 창립(1991)과 학술지 『한국실학연구』의 창간(1999)으로 실학 연구가 활기를 얻고 실학의 시야가 동아시아로 확장되고 있다.

다산학술문화재단의 창립(1998)도 활력을 주었다. 재단 사업으로 『정본 여유당전서』(2012)가 출간되고, 『다산학사전』(2019)이 발간된 것은 다산학 연구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다산학술문화재단은 다산번역총서와 다산학술총서를 기획하고 발간하였다.

실학박물관 개관(2009)도 실학 지식의 대중적 확산을 촉진하고 있다. 특별전시회를 정례적으로 개최하고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실학연구총서, 실학교양총서, 실학인물총서 등 실학 관련 도서를 발간하고 있다. 재단법인 실시학사[2010년 창립]도 실학연구총서와 실학번역총서를 다수 출간하여 실학 연구의 확장에 기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실학은 광복 후 한국 역사학계의 탈식민 역사학의 산물이었다. 광복 전 일본 식민사학이 한국사에 부과한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극복하고, 조선 후기 사상사의 역동적인 변화를 내재적 근대성의 형성에서 설명하려는 노력이었다.

중세사회 해체기 주자학 봉건 이념과 대립하는 근대지향적인 현실개혁론을 실학으로 간주하는 가운데 실학자의 사회경제사상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면서 철학사상, 경학사상, 정치사상 등에 관한 연구도 후속하였다.

21세기 실학 연구 추세는 간략히 요약하기 어렵지만 크게 보아 전통적인 실학 연구를 계승하는 흐름, 동아시아 신실학의 새로운 시야를 제시하는 흐름, 개념사와 지식사의 새로운 방법으로 실학을 성찰하는 흐름이 주목된다.

조선 후기 실학 연구에 대한 학계의 합의는 아직 도출되지 못한 실정이다. 실학의 발생 원인, 실학의 본질, 실학의 유파, 실학의 단계, 주자학과 실학의 관계, 실학과 근대사상의 관계 등 핵심 문제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가설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고 정합적인 설명이 요망된다.

실학은 학술적으로 재구성된 존재이다. 여전히 열려 있는 가설적인 개념이다. 실학의 발전적인 해소도 가능하고 실학의 합리적인 개량도 가능하다. 조선 후기 사상사 연구의 심화 과정에서 실학 개념의 유용성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을호가 말했듯이 실학은 미래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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