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근 ()

근대사
인물
해방 이후 『국사요의』, 『조선시대사상사연구논고』 등을 저술한 학자. 국사학자.
이칭
서우(西牛)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5년
사망 연도
1999년
출생지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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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한우근은 해방 이후 『국사요의』, 『조선시대사상사연구논고』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915년에 태어나 1999년에 사망했다. 평양 출신으로 1930년 광주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아 동맹휴학에 참여하였다가 퇴학당했다. 1941년 동경제국대학 서양사학과에 입학했다가 학도강제징용에 끌려갔다. 광복 후 경성대학 사학과에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1952년 부산 피난 시절에 역사학회를 창립하였다. 1959년 서울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이래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동아문화연구소, 진단학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문화연구소 등에서 활동하며 국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정의
해방 이후 『국사요의』, 『조선시대사상사연구논고』 등을 저술한 학자. 국사학자.
개설

평안남도 평양 출신. 호는 서우(西牛). 아버지는 한광전(韓匡銓)이고, 어머니는 손정운(孫正雲)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 조부인 한치기(韓致機: 호는 海石)로부터 한문을 수학하고, 1922년 평양공립종로보통학교에 입학해 1929년 3월에 졸업하였다. 4월에 평양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광주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아 동맹휴학에 참여하였다가 1930년 2월에 퇴학당하였다.

1931년 9월에 사립학교인 배재고등보통학교(지금의 배재고등학교)에 편입학, 1935년 3월에 졸업하였다. 1937년 4월 일본 제5고등학교인 구마모토[熊本]고등학교 문과에 유학, 1941년 3월에 졸업한 후 1941년 4월 일본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서양사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일제 말기 학도강제징용에 끌려가, 함경남도 문천군 조선 소전야(小田野)세멘트 제조주식회사 천내공장(川內工場)에서 강제노동을 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후 징용에서 풀려 나와 1946년 2월에 경성대학 문학부 사학과(국사전공)에 편입했다가, 1947년 8월 교명이 바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뒤 1972년 2월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7년 9월부터 1950년 6월까지 동성중 · 고등학교 교사, 1949년 4월부터 1959년 7월까지 서울대학교 강사를 역임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 해 12월부터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역원(役員)으로 근무하다가, 1951년 9월부터 1953년 7월까지 부산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부산 피난시절인 1952년 3월에는 역사학회를 창립해 편집간사 및 대표간사를 맡았으며, 1952년 11월 김병훈(金柄勳)의 딸 김의신(金義信)과 혼인하였다.

환도 후에는 1953년 9월부터 1955년 3월까지 보성고등학교 교사, 1955년 4월부터 1959년 6월까지 홍익대학교 조 · 부교수, 1959년 7월부터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조교수 · 부교수 · 교수를 역임하였다. 1973년 9월부터 1979년까지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을 역임하였고, 1981년에 정년퇴직하였다. 정년퇴직 후에는 한양대학교 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지금의 한국학중앙연구원) 객원교수를 역임하였다.

서울대학교 교수로 봉직하면서 많은 제자를 양성해 국사학계에서 활동하게 하였다. 또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부설 동아문화연구소 창립에 참여(1961), 진단학회 감사(1962) · 이사(1964) · 평의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1965),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부설 한국문화연구소 소장(1970), 대한민국 선거사 · 정당사편찬위원회 위원(1972),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자문위원(1974), 대한민국학술원회원(1974), 서울대학교30년사 편찬위원회 위원장(1976), 서울 6백년사 편찬위원회 위원(1976), 성균관대학교 임시관선이사(1977), 민족문화추진회 감사(1979) 등을 역임해 국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한편 1961년 9월부터 1년간 미국 록펠러재단 지원으로 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에서 연구하였고, 1962년 7월에는 영국 · 독일 · 프랑스 · 네덜란드 · 스위스 · 이탈리아 · 이집트 · 인도 등지를 시찰하였다. 말년에는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에서 『대전회통(大典會通)』을 강의해 한문 국역 인력을 양성하였고, 팔순이 넘어서도 연구에 몰두해 많은 논문과 저서를 내놓았다.

1999년 9월 28일 『학술원논문집』에 실을 「조선시대의 익명서(匿名書) 연구」를 집필하던 중에 운명하였다. 1971년 1월에는 한국출판문화상(저작상), 1979년 9월에는 대한민국학술상(공로상), 그 뒤 1994년 10월에 위암학술상을 받았다.

학문 및 저술활동

한우근의 학풍은 사료를 통해 사실을 고증하고 해석하는 철저한 실증주의 사학( 실증사학)의 입장을 취하였다. 한우근은 만학(晩學)으로 국사학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시간을 소중히 아꼈으며 일체의 잡무를 사양하고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만년에는 바둑에 취미를 붙였고, 사우간의 대화는 주로 학문적인 것에 한정하였으나, 유머 감각이 뛰어났다.

저서로는 『국사요의(國史要義)』(장왕사, 1954), 『국사개론(國史槪論)』(공저, 명학사, 1958), 『한국통사(韓國通史)』(을유문화사, 1970), 『The History of Korea』(이경식 역, 1970), 『사료(史料)로 본 한국문화사(韓國文化史)』(조선전 · 후기편)(공편저, 일지사, 1985), 『동학란 기인에 관한 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1971), 『성호이익연구(星湖李瀷硏究)』(서울대학교출판부, 1980), 『동학(東學)과 농민봉기(農民蜂起)』(일조각, 1983), 『이조후기의 사회와 사상』(을유문화사, 1961), 『기인제연구(其人制硏究)』(일지사, 1992), 『유교정치(儒敎政治)와 불교(佛敎)』(일조각, 1993), 『조선시대사상사연구논고(朝鮮時代思想史硏究論考)』(일조각, 1996), 『민족사(民族史)의 전망(展望)』(일조각, 1997) 등이 있다.

역서로는 『조선기행(朝鮮紀行)』(Ernst Oppert 저, 문교부, 1956 ; 개정판, 일조각, 1974), 『역주경국대전(譯註經國大典)』(공역주)(번역편, 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1986), 『욕망과 욕심』(한우근전집간행위원회, 200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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