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1책. 필사본으로 전하다가 1910년대 광문회(光文會)에서 신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국조당론(國朝黨論)’이라는 이칭도 있다.
1575년(선조 8)에서 1755년(영조 31)까지의 약 180년간을 대상으로 하여 당론(黨論) 전개의 줄기를 잡고, 머리에 자서(自序), 말미에 원론(原論)을 붙였다. 자서에 따르면, 할아버지 시원(是遠)의 『국조문헌(國朝文獻)』 가운데서 당론 관계를 발췌해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은 저자가 33세에 모친상, 35세에 부친상을 잇달아 당해 강화도 향리에 머무르고 있을 때 저술한 것인데, 1890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1800년대 초부터 각 당파에서 편간하기 시작한 당론사서류(黨論史書類)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른 당론사서에 비해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저자 집안의 당색인 소론의 입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평도 있다.
저자는 조선의 붕당을 “고금의 붕당을 통틀어서 지극히 크고, 지극히 오래고, 지극히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정리는 후일의 정사(正史) 편찬에 한 도움이 되고자 하는 데 그치는 것이라고 하였다.
원론에서 조선의 붕당 대립이 심했던 까닭으로 ① 도학태중(道學太重), ② 명의태엄(名議太嚴), ③ 문사태번(文詞太繁), ④형옥태밀(刑獄太密), ⑤ 대각태준(臺閣太峻), ⑥ 관직태청(官職太淸), ⑦ 벌열태성(閥閱太盛), ⑧ 승평태구(昇平太久) 등 여덟 가지를 지적해 붕당에 대한 자신의 기본적인 견해의 일단을 피력하였다.
저자는 소론계의 명문출신이다. 그러나 중인(中人)출신의 지식인들과도 교유 관계를 넓게 가지면서 조선왕조의 양반정치에 대해 일정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요컨대, 이 책은 양반정치의 청산을 위한 하나의 정리로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의식은 일제의 식민주의사관 창출에 악이용되기도 하였다. 시데하라(幣原垣)의 『한국정쟁지(韓國政爭志)』(1907)를 필두로 일본인 학자들은 조선왕조의 역사를 당파성이 강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들의 대부분이 그 근거로 위 원론의 여덟 가지 이유를 활용하였다.
즉, 붕당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및 해석은 이미 조선인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하여 기정사실화시켰던 것이다. 1948년 금융조합연합회 협동문고(協同文庫)로 첫 국역본이 나온 뒤 현재 여러 종의 역주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