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처분은 1716년(숙종 42) 노론 송시열과 소론 윤증 간의 회니시비에 대해 국왕이 윤증의 잘못으로 판정한 사건이다. 회니시비는 사림 사이의 문제였으나 희빈장씨의 처벌과 『예기유편』 문제로 노·소론 대립이 격화되며 조정의 대립으로 확대되었다. 이즈음 『가례원류』 발문 논란이 발생했는데, 숙종은 윤증을 옹호, 소론계 주장에 동조했다. 이후 노론에 대한 소론의 공격이 심해졌고, 숙종은 신유의서와 묘갈명을 검토하고 처분을 내리면서 윤증에 대해서는 선정과 칭호를 금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소론은 심각한 타격을 입고 정국에서 위축되었고 노론은 정국 주도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노론과 소론 사이의 갈등 과정에서 있었던 처분으로, 소론 측에서는 ‘병신사화(丙申士禍)’ 또는 ‘병신지화(丙申之禍)’ 등으로 규정하였다. 병신처분은 1716년(숙종 42)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 사이에서 발생한 회니시비(懷尼是非)에 대해 국왕이 판정한 처분을 말한다.
회니시비는 1669년(현종 10) 윤증의 부친인 윤선거(尹宣擧)가 사망하자, 송시열에게 묘갈명을 부탁하여 받았는데, 이에 대해 윤증이 불만을 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사림 사이의 논쟁이 이후 중앙 정치로까지 비화되었는데, 병신처분은 이 시비에 대해 윤증의 잘못이라고 판정한 사건이다. 병신처분은 사제 간의 옮고 그름에 대한 판정을 넘어 양인을 영수로 하는 노론과 소론 사이에 정치적 입지에까지 영향을 미쳐, 정국에서 소론 세력의 입지가 위축되게 되었다.
회니시비는 윤선거의 묘갈명 문제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이후 송시열로부터 이단이라 평가된 윤휴(尹鑴)에 대한 평가 문제, 나아가 성리학을 둘러싼 학문적 입장의 차이로까지 논란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사문의 시비에서 그쳤다.
한편 중앙 정치는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들이 정계에서 축출된 상태에서 서인인 노론과 소론이 공존하며 정국을 주도하는 상황이었다. 다만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둘러싸고 무고옥(巫蠱獄)이 발생한 뒤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처벌 문제로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였다. 그러나 숙종의 강력한 탕평 의지로 정국이 파탄에 이르지는 않았다.
이후 1710년(숙종 36) 소론인 최석정(崔錫鼎)의 『예기유편(禮記類編)』을 둘러싸고, 노론 측에서 주자(朱子)를 경시하고 주자의 학설에 어긋났다고 하여 판각을 불태우자고 주장하면서 노 · 소론 대립이 격화되었다. 결국 판각을 모두 거두어 불태우는 것으로 소란은 일단락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점차 노론 세력에게 정국의 주도권이 넘어갔다.
숙종대 후반 노론과 소론은 최석정이 윤증을 위해 지은 제문 문제로 다시 대립하였다. 최석정이 제문에서 송시열의 복수대의(復讎大義)를 공언(空言)과 고론(高論)으로 비난하였기 때문이다. 이 논란에 대해 숙종은 공적인 문제가 아니라며 판정을 회피하였다. 이후 1711년(숙종 37) 『가례원류(家禮源流)』가 간행되면서 다시 노 · 소론이 대립하였다.
『가례원류』는 병자호란 직후 유계(兪棨)와 윤선거(尹宣擧)가 함께 가례(家禮) 관련 글들을 정리한 것인데, 유계의 손자 유상기(兪相基)가 간행을 주도하면서 유계가 단독으로 엮은 것이라 하였다. 당시 간행된 『가례원류』에는 노론의 권상하(權尙夏)가 서문을, 정호(鄭澔)가 발문을 썼다. 논란이 되자, 숙종은 책을 확인한 뒤 발문을 쓴 정호가 윤증을 비난한 것은 잘못이라 판정하고 정호를 파직시키는 한편 발문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즈음 회니시비가 조정에 있는 노론과 소론 간의 대립으로 확대되었다. 회니시비에 대해 숙종은 처음에는 아버지가 중(重)하고 스승이 경(輕)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윤증을 옹호하면서 윤증을 비난하는 노론계 인물들을 처벌하는 등 소론계 주장에 동조하였다.
국왕의 지지에 힘입어 노론에 대한 소론의 공격이 심해졌다. 이에 숙종은 회니시비의 핵심으로, 1681년(숙종 7) 윤증이 송시열의 학문을 비판하면서 보낸 서찰인 신유의서(辛酉擬書)와 송시열이 쓴 묘도문 등을 검토한 뒤에는 윤증의 말이 너무 송시열을 억누르는 것이 많으니 허물이 없다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여러 사람들이 이를 따지는 것이 괴이하지 않다는 판결을 내렸다. 동시에 앞서 『가례원류』 시비 때 빼도록 한 정호의 발문을 다시 넣도록 하였으며, 윤증에 대해서는 선정(先正)의 칭호를 금하도록 하였다. 이를 병신처분이라고 한다.
병신처분은 회니시비를 둘러싸고 심각해진 노론과 소론 사이의 대립과 분쟁에 국왕이 직접 관여하여 처분을 내린 것이었다. 국왕의 판정으로 소론은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이념과 명분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고 정국에서 위축되었다. 반면 노론은 숙종의 인정과 지원을 받아 정국 주도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병신처분은 사문의 시비에서 시작된 회니시비에 대해 국왕이 판정을 내린 처분이다. 이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노론이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사문의 시비까지 국왕이 판정한다는 점에서 볼 때, 재위 초기부터 강조했던 군사(君師)로서의 숙종의 위상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