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는 조선 후기 호조판서, 병조판서, 경상도관찰사,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일찍이 동궁(東宮)의 요속(僚屬)이 된 인연으로 영조의 지우(知遇)를 입어 탕평 정권에 참여하여 직간(直諫)하는 신하로 이름을 얻었다.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이 있었다. 소론의 당론을 견지하며 이광좌를 사표(師表)로 삼아 지론이 시종 일관 변하지 않았다. 노론을 견제하다가 곤경에 처하였으며, 결국 을해옥사 때 역모자가 진술한 초사(招辭)에 이름이 나와 문초를 당하는 수모를 겪고 정계를 은퇴한 후 사망하였다.
1723년(경종 3)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 뽑혔고, 승정원 가주서 및 사변 가주서(事變假注書)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정7품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역임하고 정5품 병조정랑에 올랐으나, 1724년(영조 즉위년) 노론이 집권할 때 삭직되었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으로 다시 등용되어 그해 10월 1차 영남별견어사(嶺南別遣御史)로 나가 흉년 중 구휼과 탐관오리에 대한 징계 등을 아뢰었다. 이듬해인 1728년(영조 4) 3월에 2차 영남별견어사로 복명하여 자인현감, 대구판관, 울산부사, 용인현감 등을 모두 파직시켰다.
1728년 무신난으로 불리는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 4개 도를 관할하는 사로도순문사(四路都巡問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임명되어 난을 토벌하였다. 이어 민심 수습을 위한 영남안무사(嶺南安撫使)로 나아갔다가 바로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730년 경연 참찬관(參贊官)과 대사성 · 대사간 · 도승지를 역임하였으며, 1731년(영조 7) 영남 감진어사(嶺南監賑御史)로 나가 기민(饑民) 구제에 힘썼다. 1732년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이 되었고, 경연 특진관을 역임하였다.
1734년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예조참판으로 재직 중에 진주부사(陳奏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사행을 다녀온 뒤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739년 함경도관찰사와 1741년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역임하였다. 함경도관찰사 시절 흉년이 들자 함경도 감영의 은으로 경상도의 곡식을 바꾸어 진휼(賑恤)과 무곡(貿穀)에 힘썼다.
1743년 경기도관찰사와 1744년 황해도 수군절도사, 1745년 어영대장을 역임하였다. 1750년(영조26) 어영대장 · 수어사(守禦使)를 역임한 뒤, 균역법(均役法) 제정 논의 때 호전론(戶錢論)을 펴다가 뜻이 맞지 않아 관동영남균세사(關東嶺南均稅使)로 나아가 어염선세(魚鹽船稅)를 획정하였다.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 세손사부(世孫師傅) 등을 지냈다.
1755년(영조 31)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으로 시작된 을해옥사(乙亥獄事)가 일어났가. 역모자가 진술한 초사(招辭)에 박문수의 이름이 나와 문초를 겪었지만, 영조는 이를 무고(誣告)로 보았다. 박문수는 죄인으로 자처하며 문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이듬해 병으로 사망하였다.
『박충헌공연보(朴忠憲公年譜)』가 전하며, 묘는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은지리 산 1-1에 있으며,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이다. 글씨로는 안성의 『오명항토적송공비(吳命恒討賊頌功碑)』가 전한다. 네 차례에 걸쳐 어사로 파견되었던 행적이 각색되며 암행어사 박문수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1737년 도승지를 역임한 뒤 병조판서가 되어 「금군절목(禁軍節目)」을 편찬하였다. 1749년(영조 25) 호조판서로서 호조 재정의 정리와 낭비를 막기 위해 『각전각궁공상정례(各殿各宮供上定例)』 6권, 『국혼정례(國婚定例)』 2권, 『각사정례(各司定例)』 12권, 『상방정례(尙方定例)』 3권을 합해서 『탁지정례(度支定例)』를 편찬하였다. 1753년(영조 29) 당시 공인(貢人)과 시전상인(市廛商人)의 폐단을 정리한 『貢弊(공폐)』와 『市弊(시폐)』를 편찬 · 간행함으로써 공인과 시인의 대한 폐막을 대대적으로 이정(釐正)하였다.
이인좌의 난을 토벌한 후에 공신 책봉의 예에 따라 분무이등공신(奮武二等功臣)에 녹훈(錄勳)되었으며, 영성군(靈城君)에 봉작되었다. 1756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