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5년(숙종 41) 진사가 되고, 1731년(영조 7)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김석일은 시권(試券)에 탕평(蕩平)을 공격하는 말을 쓰고, “진가(眞假)를 구별하지 않고 상하가 서로 몽롱(朦朧)하다.”라고 말하여, 영조가 급제 명단에서 제외하는 발거(拔去)를 명하였다가 곧 중지하였다.
1734년(영조 10)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735년(영조 11) 탐오한 관리와 무신 수령의 불법을 논계하였는데, 도리어 헌납(獻納) 서명형(徐命珩)이 그를 파직하자고 청하였다. 이때 정언(正言) 김도(金䆃)가 서명형의 행동을 논척하며 파직을 청한 일이 있었다.
1739년(영조 15) 정언에 임명되었다. 이때 영조가 안상휘(安相徽)를 멀리 귀양보내고, 김유(金濰) 등을 천극(栫棘)하며, 서명균(徐命均)을 파직(罷職)하고, 이종성(李宗城)을 삭직(削職)한 일이 잘못한 일이라고 상소하였다. 말이 매우 절실하고 정직하였으나, 영조는 엄한 비답을 내리고 김석일을 파직시켰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김석일이 능히 곧은 말을 한 것이었다고 매우 칭찬하였으나, 영조는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1741년(영조 17) 동래부사에 임명되었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이듬해 망미루(望美樓)를 건립하였다. 망미루는 1972년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어 있다.
저서에는 시 · 제문 · 소 · 기 등을 수록한 시문집으로 6권 2책의 『허주와유고(虛舟窩遺稿)』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