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진은 조선 후기에 도승지, 광주부유수, 판돈녕부사, 판의금부사, 형조 · 병조판서, 대사간, 대사성 등을 역임한 소론계 문신이다. 1786년(정조 10)에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죽음과 관련된 '병오년의 상변(喪變)'에 연루되었던 조시위(趙時偉)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논척당하였다. 1796년(정조 20)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한 뒤 한성부판윤 · 공조판서 · 형조판서 · 예조판서 · 판의금부사 등을 지냈다. 1820년(순조 20)에 지중추부사로 사망하였다. 1827년(순조 27)에 익정(翼貞)으로 시호를 받았다.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이진(爾珍)이다. 조대수(趙大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철명(趙哲命)이고, 아버지는 조재우(趙載遇)이며, 어머니는 정석로(鄭錫老)의 딸이다.
1769년(영조 45)에 유학(幼學)으로 인일제에서 직부전시(直赴殿試)를 받아서 1773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75년(영조 51)에 설서로 왕세손이었던 정조를 보필하고, 승지를 역임하며 도승지에도 임명되었다. 사간 · 부응교를 거쳐 1780년(정조 4)에 예조참의와 대사간을 역임하고, 같은 해 6월에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으며, 황해도 배천의 조재항 옥사(趙載恒獄事)를 잘못 처리한 죄로 파직되었다.
1782년에 대사성 · 부제학에 오른 뒤 1784년에 세자시강원 정3품 보덕에 임명되었고, 대사성 · 부제학 · 대사간 등을 번갈아 지냈다. 1793년(정조 17) 5월에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이때 사간 신우상(申禹相)이 1786년(정조 10)에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죽음과 관련된 '병오년의 상변(喪變)'에 연루되었던 조시위(趙時偉)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논척하였다가 도리어 신우상이 체직되었고, 그는 상주목사로 나갔다.
1796년(정조 20)에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한 뒤 한성부판윤 · 공조판서 · 형조판서 · 예조판서 · 판의금부사 등을 지냈다. 1799년(정조 23) 8월에 진하 겸 사은정사(進賀兼謝恩正使)로 청나라의 연경(燕京)에 갔다가 11월에 돌아와 청나라에서 보고 들은 정치 현실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순조가 즉위한 뒤 형조판서 · 한성부판윤 · 판의금부사 · 실록청당상 · 사포서제조 · 사직서 제조 · 좌우참찬 · 지중추부사 · 판돈녕부사 · 병조판서 · 호조판서 등을 차례로 지냈고, 1813년(순조 13)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고,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로 나갔다가 1816년(순조16)에 사직하였다.
공조판서 · 좌빈객 등을 지내고 1820년(순조 20)에 지중추부사로 사망하였다. 1827년(순조 27)에 익정(翼貞)으로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