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검은 조선 후기, 영조 ‧ 정조 연간 소론계 인물로, 설서, 승지, 지평, 정언, 장령, 대사간 등을 지낸 문신이다. 첫 번째 부인이 반남 박씨 박태보(朴泰輔)의 손녀딸이자 박필모(朴弼謨)의 딸이다. 이종성, 윤광소 등과 정치적 활동을 함께 하였다. 1762년(영조 38) ‘임오화변(壬午禍變)’ 때 승지를 역임하였는데, 영조가 크게 노하여 세자에게 죽음을 명하자, 영조의 명을 받들 수 없다고 한 일이 있었다. 분의를 다하였던 공으로 1789년(정조 13)에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조선 후기 문신으로, 1710년(숙종 36)에 태어나 1767년(영조 43)에 죽었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성종(聖從)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정재한(鄭載漢)이고, 할아버지는 정복선(鄭復先)이다. 아버지 정석원(鄭錫遠)과 경주 김씨 김종연(金宗衍)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첫 번째 부인은 반남 박씨 박태보(朴泰輔)의 손녀딸이자 박필모(朴弼謨)의 딸이고, 두 번째 부인은 전주 이씨 이광주(李匡周)의 딸이다. 아들은 정동익(鄭東翼)이다.
1735년(영조 11)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1738년(영조 14)에 설서(說書), 1745년(영조 21에) 정언에 제수되었다. 1748년(영조 24)에 부교리 재직 시절 송덕중(宋德中)이 이종성(李宗城)을 논척한 일에, 이종성을 보호하며 송덕중을 논척하였다가 어면만호(魚面萬戶)로 좌천되었다.
차대의 자리에서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 옥당(玉堂) 윤광소(尹光紹)가 영조에게 정순검의 건강상의 사정을 말해서 어면만호에서 체차되었다. 1755년(영조 31)에 장령(掌令), 1756년(영조 32)에 수찬(修撰) · 사간(司諫) · 집의(執義) 등을 역임하고, 1761년(영조 37)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1762년(영조 38) ‘ 임오화변(壬午禍變)’ 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는데, 영조가 크게 노하여 세자에게 죽음을 명하자, 명을 받들 수 없다고 하였다가 파직되었다. 1789년(정조 13)에 이조판서 김종수(金鍾秀)가 분의를 다하였던 신하들을 추념해야 한다며 품계에 따라 증직하기를 건의하여,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