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신보(愼甫). 안대재(安大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안정찬(安廷燦)이고, 아버지는 형조좌랑 안구(安絿)이다. 어머니는 유필수(柳必壽)의 딸이다.
1725년(영조 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정언을 지냈다. 1733년 장령으로 있을 때 용관(冗官: 불필요한 관리)의 감원과 휼민(恤民: 백성을 구휼함)의 정치를 논하면서, 정원 외의 궁인을 늘리지 말 것과 삼남지방의 군액(軍額)의 납포를 감하여 도망민을 막고 충군의 어려움을 구하자는 상소를 하였다.
이어 헌납(獻納)이 되어 죄가 가벼운 죄수가 옥사하는 폐단을 논하였다. 1738년 사간으로서 대각(臺閣)이 간쟁(諫諍)의 기풍이 없음을 지적하고, 시정(時政)의 득실과 관가의 시비에 논의가 있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 해에 김상헌(金尙憲)을 제향한 서원의 복건에 관하여 올린 연계(連啓)가 당습(黨習)에 관련된다 하여, 해남에 정배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1739년 사간·집의(執義)를 거듭 역임하는 등 언관으로 활약하였다. 1748년 세자시강원보덕을 지내고, 1751년 승지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