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자휘(子翬), 호는 학남(鶴南). 정시성(鄭始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인빈(鄭寅賓)이고, 아버지는 판서 정수기(鄭壽期)이며, 어머니는 윤희수(尹希壽)의 딸이다. 좌의정 정휘량(鄭翬良)의 형이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727년 정언이 되어 당시 백성들을 효유(曉諭)하는 왕의 교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각도에 반포하였다. 부수찬으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임할 때 왕에게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문집을 인판(印版)하기를 주청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지평·대사성을 역임하고 좌승지 때에는 공종수(孔宗洙)를 선성(先聖)의 후예로 추대하고 반궁(泮宮)에 두어 녹(祿)을 지급할 것을 소청하여 시행하기도 하였다. 이조참판 당시 민통수(閔通洙)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이천부사로 좌천되었으나, 이어 우참찬이 된 뒤에는 한성부에 있는 서북인을 등용하여 인심을 수습할 것을 주청하였다.
1749년(영조 25)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그 뒤 판중추부사에 전임되었다. 글씨에 능하여 작품으로 개성계성사비문(開城啓聖祠碑文)을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