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군경(君慶), 호는 월호(月湖). 조구석(趙龜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조태동(趙泰東)이고, 아버지는 조봉빈(趙鳳彬)이다. 어머니는 조헌주(曺憲周)의 딸이다.
1723년(경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730년(영조 6) 봉사(奉事)로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정언을 거쳐 1736년 제주도 안핵어사로 나갔다. 이듬해 교리로서 북관감진어사(北關監賑御史)가 되어 평안도·함경도의 기민구제 상황을 독찰하였다. 이어 헌납·교리·부응교를 거쳐 1739년 동부승지, 1740년 공홍도관찰사, 그 뒤 병조참지·부제학·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745년 대사간·대사성을, 1746년 우승지로 정조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공조참판을 거쳐 1747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750년 도승지·이조참의를 역임했는데 이 해에 균역청이 설치되자 당상관이 되어 결미절목(結米節目)을 제정하는 등 조세 운영의 합리화에 공헌하였다.
그 뒤 대사헌·동지의금부사, 이조·공조의 참판을 거쳐, 균역청당상으로서 세제 개혁에 발휘한 실력이 인정되어 1752년 호조판서에 특진되었다. 이어 한성부판윤이 되어 도성의 개천을 준설하였다. 이듬해 형조와 이조의 판서를 거쳐 1755년 찬집당상으로 『천의소감(闡義昭鑑)』 편찬에 참여하였다. 1756년 강화부유수를 거쳐 세자시강원우빈객·예조판서, 1759년 세손사부, 1760년 수어사가 되었다.
조선 후기 정치 개혁과 문화 진흥에 많은 공헌을 남겼다. 특히『농사총론(農事總論)』은 천시(天時)·지리(地利)·농기(農器)·인사(人事)·수리(水利)·부종(付種)·수차(水車)의 중요성을 역설, 종래 다른 농서와 비교된다. 그리고 조태만(趙泰萬)이 찬술한 『양주조씨세보(楊州趙氏世譜)』를 증수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