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진관체제(鎭管體制)는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전반 동안 점차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군역 의무 수행의 일반적인 형태로 등장한 것이 부경정군(赴京正軍)의 경우 수포대립제(收布代立制), 각 지방의 진(鎭) · 영(營)을 방수하는 유방정병(留防正兵)의 경우 방군수포제였다.
지방군의 방군수포는 당초 군사들의 편의를 위한 점이 없지 않았다. 즉 15세기 말 각 포(浦)의 만호(萬戶) · 천호(千戶) 등은 당번의 선군(船軍)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입번(立番)하지 않으면 월령(月令)이라 하여 매 1월당 베 3필 또는 쌀 9말씩 징수한 예가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지휘관의 사리 축적을 위해 강요되는 식으로 변화하였다. 1492년(성종 23) 평안도병마절도사 오순(吳純)은 1,234명의 군사를 방귀시키고 쌀 · 베 등을 거두어들인 혐의로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불법 행위는 지방군의 경우 군사들에 대한 감독권이 지휘관 자신에게 전적으로 맡겨져 있었으며, 특히 대역인(代役人)이 개재되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자행될 수 있었다. 이로써 거두어들인 재화는 모두가 병사(兵使) · 수사(水使) · 첨사(僉使) · 만호와 그 수하 관속들의 사적 점유가 되었다.
그 결과 병영 · 수영의 거진(巨鎭)에도 유방하는 자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형세 아래 “모 진의 장(將)은 그 가격이 얼마이고 모 보(堡)의 관(官)은 얼마이다.”라고 공언되었으며, 그들에게는 채수(債帥 : 빚쟁이 장수)라는 별명이 붙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에 대해 이이(李珥)는 그의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① 병사 · 수사 · 첨사 · 만호 · 권관(權管) 등의 관직에 따른 녹봉이 책정되지 않고, ② 각 지방 수륙군의 유방지와 거주지가 일치하지 않으며, ③ 매 6년마다 실시하는 군적(軍籍)의 개정이 제대로 실시되지 않기 때문임을 지적하였다.
이 제도는 진관체제의 허실화를 의미하며, 국방체제의 약화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