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결은 조선 후기에 조정에서 풍흉에 따라 지급한 재결을 지방관청에서 농민에게 나누어준 뒤 남은 재결이다. 지방관청에 할당된 재결은 재해 정도에 비해 부족한 때도 있었지만, 오히려 남는 때도 적지 않았다. 이때 표재(俵災) 뒤에도 남은 재결을 여결이라 하였다. 여결이 발생할 때에는 호조에 반납하고 전세를 부과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지방관청에서는 이를 숨기고 반납하지 않는 일이 빈번하였다. 여결을 반납하지 않으면, 해당 지역에 부과되는 전결세가 그만큼 줄어들었기에 여결에서 발생하는 세액만큼 지방관청에서 유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근대 농업사회에서 매년 달라지는 풍흉은 농민들의 경제활동에 중요한 변수였다. 조선에서는 흉년에 어려움을 겪는 농민들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기 위하여 급재(給災) 제도를 운용하였다.
급재는 매년 흉년의 정도를 파악하여 지역별로 면세 혜택이 부여되는 재결(災結)을 지급하는 제도를 말한다. 여기서 호조가 미리 예상하여 재결을 지급한 것을 사목재(事目災)라고 하며, 사목재가 부족하면 관찰사가 추가로 조정에 요구하여 얻은 재결을 장청재(狀請災) 혹은 가청재(加請災)라고 한다. 이처럼 지방관청에 할당된 재결은 재해의 정도에 비해 부족한 때도 있었지만, 오히려 남는 때도 적지 않았다. 이때 표재(俵災) 뒤에도 남은 재결을 여결(餘結)이라 하였다.
여결이 발생할 때에는 그대로 호조에 반납하고 전세를 부과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지방관청에서는 이를 숨기고 반납하지 않는 일이 빈번하였다. 여결을 반납하지 않으면, 해당 지역에 부과되는 전결세가 그만큼 줄어들었기에 여결에서 발생하는 세액만큼 지방관청에서 유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결은 세입과 직결되는 중대한 사안인 만큼 조정에서도 여결 문제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처벌에 나서지는 않았다. 많은 군현에서 여결에서 거둔 세액을 자체적으로 진휼하거나 관청 경비에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 재정은 점차 감소하고, 중앙정부가 이를 보전해 줄 마땅한 대책이 없었던 상황에서 무턱대고 여결을 단속하기는 어려웠다. 또한 백성을 위해 여결을 사용하였다는 지방관의 항변에 백성을 위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임금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조도 18세기 이후 계속해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토지가 감소하자 변하기 시작하였다. 여결의 자의적 사용이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두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마침내 『 속대전』에 명문화되어 여결의 모든 사용이 금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