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20년마다 양전(量田)을 시행하여 지목별 토지를 파악하는 것이 법규였다. 하지만 농민들의 반발과 인력 · 비용 등이 문제가 되어 20년 주기 양전 규정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오랜 기간 양전이 시행되지 않으면서 국가가 파악한 토지와 실제 토지 사이에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러한 문제는 전쟁이나 극심한 흉년을 당한 이후에는 더욱 심하게 벌어졌다.
많은 토지가 농사를 짓지 않고 있었지만, 장부상으로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는 과세할 때 하나하나 토지에 부과하지 않고, 지역마다 결수(結數)를 정하여 할당하는 방식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실제보다 초과하여 부과된 결수를 허결이라 하였다. 실제 존재하는 땅을 없는 것처럼 숨긴 은결(隱結)과는 정반대의 개념이었다.
허결은 존재하지 않는 땅이었기 때문에 허결의 수만큼 농민들은 추가로 전결세를 책임져야 하였다. 허결은 양전을 파악한 토지가 뒤에 진황되어 발생하기도 하였지만, 양전어사(量田御史)나 관찰사가 의도적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해당 지역에 전결세가 적다고 판단되면 자의적으로 결수를 늘려 각 고을에 배분한 것이다.
광해군 연간에는 경상도의 허결이 3만여 결에 달할 정도로 허결의 피해는 컸다. 같은 시기 경기에서 그해에 농사를 지은 땅인 기경전(起耕田)이 3만 9천여 결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경상도의 허결 규모는 너무 과도하였고, 그만큼 농민들은 고통받아야만 했다. 허결은 양전을 통해 해소되기도 하였지만, 오히려 양전 과정에서 새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은 경자양전 이후로 대한제국 이전까지도 단위 양전을 시행하지 않고, 읍별로 진전(陳田)을 조사하는 사진(査陳)만 간간이 시행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허결 문제는 19세기 이후에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