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지방 관청에서 자의적으로 징수하던 각종 잡역(雜役)이 규제되었다. 또한 몇 차례의 양전(量田)과 균역법(均役法) 시행으로 지방 재정을 보조하던 은결(隱結)이 대거 중앙 정부에 귀속되면서 지방 재정은 큰 난관에 봉착하였다. 더불어 감필(減匹)에 따른 재정 손실이 커지면서 지방 군현에서는 다양한 재정 마련 방안이 논의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필요한 군역자의 수보다 충원할 백성의 수가 적은 상태, 이른바 군다민소(軍多民少)가 광범위하게 문제가 되고 있었다. 따라서 한 사람에게 여러 사람의 군역(軍役)을 담당시키는 첩역(疊役)이 발생하였다. 군역의 부담이 커지자 부정한 방법으로 입역(入役) 대상에서 이탈하려는 자들이 증가하였고, 이는 군역 자원의 감소로 이어져 더 많은 첩역이 발생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과중한 군역은 농민들의 도산과 도망을 초래하였고, 마을에 남겨진 자들은 인징(隣徵), 족징(族徵)과 같은 부당한 군역 부담과 이전보다 더한 첩징을 감내해야만 하였다. 군역 자원의 부족이 심각해지자 지방의 이서(吏胥)들은 나이가 많아 이미 면역 대상인 자들에게까지 군역을 부과하였는데, 이것이 강년채이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16세에서 60세까지의 양인 남자에게 군역을 부과하는 것이 규정이었다. 그러나 이서들은 면역 대상자의 나이를 자의적으로 낮춰 계속해서 군역에 필요한 정원을 채웠다. 심지어 강년채를 내는 자들에게 추가로 마감채(磨勘債)까지 징수하면서 농민들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강년채는 이미 군역을 치를 나이가 지난 자들에게 부과하는 것이었기에 이미 고령으로 노동력을 대부분 상실한 자들에게 더욱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고, 많은 미납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또 다른 인징, 족징의 계기가 되어 향촌 사회의 쇠퇴는 가속화되었다. 강년채는 이른바 ‘ 삼정(三政) 문란’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임술민란(壬戌民亂)이 발생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