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옹진 출신. 호는 소정(小亭). 한의사 정연(晶淵)과 조선 왕조의 마지막 화원이었던 조석진(趙錫晋)의 딸인 함안 조씨(咸安趙氏)의 둘째 아들이다.
1910년 11세 되던 해 서울로 올라와 1917년 외할어버지인 조석진이 교수로 있는 서화미술원(書畵美術院)에 입학하면서부터 그림 수업이 본격화되었다.
1923년 서화미술원 출신의 이용우(李用雨)·노수현(盧壽鉉)·이상범(李象範) 등과 동연사(同硏社)를 조직하고 전통 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 채 해체되고 말았다.
1925년 김은호(金殷鎬)와 함께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 1929년까지 신남화풍(新南畵風)을 접하면서 화풍의 폭넓은 발전을 꾀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에는 서화협회(書畵協會)의 간사일을 맡아보았다. 1937년부터는 서울을 떠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실경(實景)을 사생하는 등 새로운 화풍의 형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國展)]에 관여하고 심사 위원을 역임한 적도 있다. 그러나 강직한 성격 탓으로 1957년 이를 떠나 여생의 대부분을 재야 화가로서 화업에만 몰두하며 보냈다.
갈필(渴筆)의 적묵법과 파선법 위에 갈색으로 응결시켜 짙고 거친 분위기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화풍은 대체로 3기로 나누어 변천하였다.
1917년에서 1936년까지의 초기는 주로 서화미술원이나 일본 유학 등을 통하여 그림 수업을 받으며 자신의 화풍 형성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던 전습기였다. 남북종(南北宗) 절충 화풍과 서구적 기법이 가미된 일본의 신남화풍이 근간을 이루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이미 거친 화면 처리와 시선의 다각적인 전개 등으로 그의 독자적인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37년 서울을 떠나 전국을 여행하면서 실경 사생(實景寫生)을 통하여 자신의 화풍을 다졌던 중기는, 그가 광복 이후 참여하였던 국전을 떠나기 직전까지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누각정경도(樓閣情景圖)」(1939년)와 「산수춘경도(山水春景圖)」(1944년), 「해금강삼선암추색도(海金剛三仙巖秋色圖)」(1955년)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향토색 짙은 실경을 소재로 적묵법과 파선법이 밀도 있게 다루어졌다.
1957년부터 그가 타계하기까지의 후기는, 적묵법과 파선법과 더불어 분방한 호초점(胡椒點)을 즐겨 다루었던 원숙기이다. 특히 구도에 있어서 황금 분할식 공간을 시도하기도 하고, 정물의 일부분을 대담하게 부각시키는 등 다양함을 보여 주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농가도」(1957년), 동아일보사 소장의 「무창춘색도(武昌春色圖)」, 「외금강삼선암도(外金剛三仙巖圖)」(1970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