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구 출신. 아버지 향지(享智)와 어머니 윤복주(尹福珠) 사이에서 6남매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양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세가 몰락하게 되자 진학을 포기하고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하였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채화 「봄이 오다」가 입선된 이후 1936년부터 1944년의 마지막회까지 이 전람회의 공모 출품을 통하여 화가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1952년 월남하여 대한민국미술전람회와 대한미협전(大韓美協展)을 통하여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195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추천 작가가 되었으며, 이어 1962년에는 심사 위원이 되었다.
그는 “나는 인간의 착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며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라고 하였다.
주제에 있어서 앞의 말대로 그가 실제로 체험하였던 주변의 가난한 농가의 정경과 서민들의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생활 정경을 주로 사용하였다. 또한 이러한 주제에 풍부한 시정(詩情)을 가미하여 일관성 있게 추구하였다. 그리고 표현 방법에 있어서도 향토색 짙은 자신의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하였다.
특히 돌밭이나 화강암의 질감을 연상시키는 마티에르는 그의 화풍상의 큰 특징이다. 붓과 나이프를 사용하여 자잘하고 깔깔한 물감의 층을 미묘하게 거듭 고착시켜 마치 화강암 표면 같은 바탕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그 위에 독특한 감흥을 주는 굵고 우직한 검은 선으로 형태를 단순화시켜 한국적 정감이 넘치는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1952년 이후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여 말년에 이르러 한층 더 심화되었다. 공간 구성에 있어서도 요약화된 형태들을 평면적으로 대비시켜 배치함으로써 그의 특이한 구성미와 현대적 조형성을 더욱 충실하게 이룩하였다.
그가 이룩한 회화 세계는 그가 죽은 뒤에 1965년 10월 중앙공보관에서 열렸던 유작전과 1970년 현대화랑에서의 유작전을 계기로 재평가되어 유화로서 가장 한국적 독창성을 발휘한 작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대표작으로 「절구질하는 여인」(1952년)·「빨래터」(1954년)·「귀가(歸家)」(1962년)·「고목과 여인」(1964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