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수현 ()

회화
인물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등을 역임한 화가.
이칭
이칭
심산(心汕)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9년(고종 36) 3월 16일
사망 연도
1978년 9월 6일
출생지
황해도 곡산
정의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등을 역임한 화가.
생애 및 활동사항

1899년 황해도 곡산(谷山)에서 출생했다. 3 · 1운동 당시 48인 중의 한 사람인 노헌용(盧憲容)이 조부이다. 1913년 보성소학교를 졸업,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진학했으나 중퇴, 1915년 서화미술회 부설 강습소 화과(畵科)에 입학하여 안중식(安中植) · 조석진(趙錫晉) 등에게 그림을 배웠다.

1917년 김윤식(金允植)조선총독부의 후원으로 개최한 문예백일장인 시문서화의과대회(詩文書畵擬科大會) 그림 부문에서 1등을 했다. 1918년 졸업 이후 안중식의 화실인 경묵당(耕墨堂)에서 이상범(李象範) 등과 함께 수학했으며, 호인 심산은 이때 안중식에게 받았다. 1920년 김은호(金殷鎬) · 오일영(吳一英) 등과 창덕궁 벽화제작에 참여, 「조일선관(朝日仙觀)」을 그렸다.

1921년부터 1935년까지 서화협회 전람회에 정회원으로서 매년 출품했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 이듬해인 제2회에서는 수묵채색화 부문 3등, 1926년 제5회에서는 특선상을 받았다. 1921년 동아일보사에 입사, 미술부 기자를 담당했고 1923년 조선일보사로 옮겨 4컷 만화 「멍텅구리 헛물켜기」를 수차례 연재했다. 1931년 중앙일보사를 거쳐 1937년부터 동아일보사에서 근무했다.

1941년 잡지 『신시대(新時代)』에 일제의 시국생활규범과 총동원 체제에 대한 호응을 내용으로 하는 중편 만화 「멍텅구리」를 수회 연재했다. 1942년 '황군위문 부채그림'을 조선총독부에 헌납했고, 18~19세기 일본에서 유행한 남화(南畵)의 연구 · 발표를 목적으로 고희동(高羲東) · 이상범 등 40여 명과 함께 조선남화연맹(朝鮮南畵聯盟)을 조직, 제1회 남화연맹 전람회에 참여했다. 당시 출품작 수익금은 모두 일본군에 헌납했다.

해방 이후 조선미술건설본부 동양화부 위원장을 맡았고, 194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가 되어 1961년 동양화과 교수로 정년퇴직, 명예교수가 되었다. 1949년 시작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제1회부터 1967년까지 수차례에 거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1962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8년 9월 6일 사망했다.

상훈과 추모

서울시 문화상(1955년), 예술원 공로상(1958년), 대한민국 문화훈장(1962년), 대한민국 문화훈장(은관, 1974년)을 받았다.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1(민족문제연구소, 2009)
『한국근대미술의 역사』(최열, 열화당, 1998)
『한국현대미술사-동양화』(국립현대미술관, 1976)
『심산 노수현(心汕盧壽鉉)』
『신시대(新時代)』
『매일신보(每日新報)』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심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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