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 직후인 8월 18일에 전국 문화예술인들을 규합한 단체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가 결성되었고, 그 산하에 문학, 미술, 음악, 영화, 연극의 5개 분과 중 하나로 조선미술건설본부가 결성되었다.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는 “자유와 독립의 정신 위에서 세계문화의 일환으로서 새 조선문화를 건설”할 것을 선언했고, “현 단계의 문화전체에 관한 통일적 연락과 각 부문활동의 질서화”를 위해서 조직된 협의기관으로서, “산하 모든 문화의 총력을 모아 신조선 건설에 이바지”한다고 선언했다.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중앙위원장으로 추대된 이는 고희동(高羲東)이었고 서기장은 정현웅(鄭玄雄)이었다. 각 부문은 동양화부, 서양화부, 조각부, 공예부, 아동미술부, 선전미술대 등의 6개 분과로 나뉘었고, 동양화부 위원장은 노수현(盧壽鉉), 위원은 김용준(金瑢俊), 변관식(卞寬植), 허백련(許百鍊)이었으며, 서양화부 위원장은 김주경(金周經)이고 위원은 길진섭(吉鎭燮), 오지호(吳之湖), 이병규(李炳圭), 이종우(李鍾禹), 조각부는 위원으로 김두일(金斗一), 문석오(文錫五), 공예부 위원은 이순석(李順石,) 아동미술부는 위원장 이병규(李炳圭) 선전미술대 대장은 길진섭(吉鎭燮), 대원은 이순석이었다. 순수 미술가 이외에도 간판 제작자를 비롯한 상업미술가들을 포함했다. 총 186명의 미술가들을 총괄한 해방 후 최대 미술가 조직이었다. 한편 프롤레타리아 미술 건설을 내세운 미술인들은 조선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을 결성했고 이 단체는 이후 조선미술동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미술건설위원회가 조선미술동맹과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중앙위원장인 고희동은 11월 20일에 조선미술건설본부의 해산을 선포하고 “정치에의 불간섭과 엄정 중립”을 강령으로 내건 ‘조선미술가협회’로 이름을 바꾸고 협회의 회장이 되었다.
조선미술건설본부는 ‘조선미술의 통일적 신건설’을 내세우고 출범했다. 최초의 활동으로 연합군 환영행렬에 쓸 초상화, 깃발, 국기를 제작했다. 선전미술대는 해방기념행사에서 국기를 제작한다든가 표어, 도안을 작성했고 9월에 있었던 연합군 환영식에서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의 4개국 국가원수들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1945년 10월 20일부터 29일까지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회 ‘해방기념과 연합군환영 미술전람회’를 개최했는데, 입장료는 1원씩 받았고, 동양화 23점, 서양화 72점, 조각공예 55점이 진열되었다. 이 가운데 고(故)안창호(安昌浩) 선생과 여운형(呂運亨) 선생의 초상 조각이 출품되었다. 50여 점의 소품은 즉매하여 ‘전재동포’를 위해 사용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