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으며, 1931년, 1932년, 그리고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다. 일본 유학 시기에는 이과전에 입선하였고, 1938년부터 1939년까지 재동경미술협회전에 참가하였으나, 1940년 이른 나이에 요절했다. 사망하던 해 재동경미술협회전에서 고석 유작전이 열렸다.
1913년 경기도 고양시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 그는 각종 미술 전람회에 참여하여 입선을 거듭하였다. 즉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오후의 뒷길」이 입선했고, 제2회 녹향회(綠鄕會)전에 「명정문(明政門)」을 출품하여 입선했다. 같은 해 「가을」을 제11회 서화협회전(書畵協會展)에 출품하였다. 1932년에는 「어선(漁船)」으로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다. 나혜석은 “매우 고심한 낯이 보인다”라고 평했다(1932년 7월 『삼천리』 기사).
1934년에는 일본 동경의 제국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 현 무사시노(武藏野)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입학하였고, 1939년 3월 10일 졸업했다. 동경 제국미술학교는 1929년 설립된 사립 미술학교로 비교적 자유로운 화풍으로 교수했으며 수업 연한은 5개년이었고, 1929년부터 45년까지 147명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수학했다(50명 졸업).
일본 유학 중 1937년에는 일본 이과전(二科展)에 「우(牛)」를 출품하여 입선했다.
또한 일본의 미술대학 유학생들과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결성한 단체인 재동경미술협회에서 개최한 전람회에 연속하여 출품하였다. 출품한 작품목록은 1938년 제1회 「습작」, 「리(鯉)」이며, 1939년 제2회에는 「화(花)」, 「수련」, 「풍경」을 출품했다. 김복진은 고석의 제1회 출품작 「습작」이 “특이한 지향”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재동경미술학생의 종합전 인상기」, 『동아일보』, 1938. 4. 28).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매년으로 출품하여 입선하였는데, 입선작은 다음과 같다.
1937년 제16회 「지어(池漁)」
1938년 제17회 「정오의 우사(牛舍)」
1939년 제18회 「정원」
1940년 제19회 「모자(母子)」
1940년 사망 후 총독부미술관에서 열린 제3회 재동경미술협회전에 고석 유작 특별전이 개최되었고 그의 작품 13점이 전시되었다.
1940년 9월 5일부터 10일까지 경성 총독부미술관에서 열린 제3회 재동경미술협회전에서 고석 유작전이 개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