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일본에 건너가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에게 사사했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 5회 입선하였고, 서화협회전에 출품하였다. 경성 고려미술원 강사로 미술지도에 힘썼으며, 조선미술전람회 개혁을 주장한 ‘개신동맹기성회’에 참여했다. 34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서화미술회에서 안중식(安中植)에게 그림을 배우고 1922년 일본에 건너가 고무로 스이운에게 사사했다. 김용수는 일본의 신남화(新南畵)의 화풍을 따른 것으로 평가되며, 초기에는 산수화를 후기에는 화조영모화를 주로 그렸다.
1923년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에 「효귀(曉歸)」로 입선하였으며, 1924년 제3회에 「월야(月夜)」가, 1925년 제4회에 「함관(函關)의 추색(秋色)」이 입선하였다. 1927년 제6회에 「황하남안(黃河南岸)」이, 1931년 제13회에는 「선경(仙境)」이 각각 입선하였다.
1924년 1월부터 고려미술회(高麗美術會)가 신설한 연구회에서 강사(講師)로서 중학생 연구생을 모집하여 지도하였다.
1924년 3월에는 고려미술원의 김은호(金殷鎬)와 함께 인천을 방문하여 인천 유지들의 발의로 산수정(山水町)공회당에서 이인(二人) 서화전람회를 개최하였다.
1927년에는 서화협회전에서 「산수」를 출품하고 전시하였다.
1931년 6월 조선미술전람회의 개혁을 주장한 단체인 ‘개신동맹기성회’에 참여했다. 당시 기성회에 모인 미술가들은 조선미술전람회에 누적된 심사의 불공정성과 작가의 대우 문제 등을 둘러싸고 개혁을 논의한 끝에 3회 이상 특선작가 추천제, 상금제, 위원제 등을 총독부에 요구했다. 같은해 군산 본음사(本音寺)에서 화폭반포회(畵幅頒布會)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