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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작품
권진규가 1953년에 제작한 석조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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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권진규가 1953년에 제작한 석조 조각.
개설

화강암. 높이 62㎝, 너비 65㎝, 두께 29㎝.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조각가 권진규(權鎭圭)가 1953년 일본의 이과전(二科展)에 출품하여 특대(特待, 특선)로 뽑힌 작품이다.

내용

권진규는 함경남도 함흥 출생으로, 1949년 스물여덟의 나이에 데이코쿠미술학교[帝国美術学校]의 후신인 무사시노미술대학[武藏野美術大學] 조각과에 입학하면서부터 정식으로 조각을 배웠다. 그는 재학 중인 1952년 일본의 이과전(二科展)에 「백주몽(白晝夢)」으로 입상했으며, 졸업하던 1953년에는 「기사」, 「마두A」, 「마두B」가, 1954년에는 「마두」, 「말」이 입선하면서 조각가로서 입지를 굳히기 시작하였다. 대학 시절 지도교수는 시미즈 다카시[淸水多嘉示, 18971981]였다. 시미즈 다카시는 유화를 배우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 유학하였으나 로뎅의 제자인 부르델(Emile Antoine Bourdelle, 18611929)에게 감명을 받고 그에게 조각을 배웠고 귀국하여 데이코쿠미술학교와 무사시노미술대학의 교수를 지내면서 일본의 전후 구상 조각의 주요 작가로 활동하였던 인물이다.

권진규는 대학 재학 시절부터 석조를 시작했는데, 당시 무사시노미술대학의 커리큘럼에서 석조는 주된 과목이 아니었다. 1학년 때는 석고 데생 연습을 하고 2학년 때부터 조각을 시작하는데, 주로 인체를 점토로 제작한 뒤 석고로 떠내는 작업이 주를 이루었다. 3학년이 되면서 목조, 석조, 테라코타, 건칠 등의 다양한 기법을 배웠고 4학년 때 브론즈 작업을 배우는 순서로 수업이 이루어졌다. 권진규는 3학년 때 배우는 석조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그의 석조 작품은 초기를 제외하고는 드물다.

말은 그가 즐겨 선택한 소재였으며 이 작품을 비롯하여 테라코타 기법을 이용하여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그가 말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에트루리아와 아르카익 등 서양 문명 초기 미술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작가에게 근원적인 힘의 소재로 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무사시노미술대학에 있었던 파르테논 신전 박공의 말 조각의 석고상이나 이탈리아의 조각가 마리노 마리니(Marino Marini, 1901~1980)의 영향이 지적되곤 한다. 그는 대학 근처의 기치죠지[吉祥寺]역 앞의 화물 운반용 마차의 말을 유심히 관찰하여 제작에 참고했다고 한다. 말과 기수가 함께하는 소재는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보이는데, 이후에도 테라코타로 제작한 작은 조각상인 「말과 소년」(1965)이나 테라코타 부조로 제작한 「기수(말과 남자)」(1965)에서도 말과 기수의 모티프는 지속된다.

「기사」의 형태는 돌의 덩어리 안에 말과 그 위에 올라 앉은 사람인 기사의 누드를 새긴 것이다. 정면이 아닌 반대편의 새김을 보았을 때 이 기사는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도 보인다. 새긴 방식은 돌을 깊이 파내지 않고 형태가 떠오르는 듯 얕게 새겨져 있는데, 극히 단순화된 말의 머리와 사람의 형태 때문에 이 조각은 아르카익(archaic)기의 조각이나 동양의 고대 묘제에 사용된 석조각을 떠올리게 하지만 현대적인 추상 형태의 감각을 보여주기도 한다. 크고 강하게 조각된 말의 목에 비하여 작게 조각된 인간의 얼굴, 그리고 말을 부여잡은 팔 다리가 하나의 돌 덩어리 속에 꽉 차게 들어앉아 있어 말과 기사는 서로 깊이 혼융하는 듯하다. 이러한 형태적 요소들은 단순하면서도 깊은 감정적 울림을 준다.

다음 해에 이과전에 출품된 「마두」에 대해서는 “로마네스크 조각을 보는 듯이 소박한 매력”이 있으며, “아르카익”한 표현력을 가졌고 고전적 조형의식의 진실성을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기사」에서 드러나는 말에 대한 관심은 「마두」 뿐만이 아니라 후기에 테라코타 기법으로 제작된 말의 형상을 담은 많은 다른 작품에서도 반복해서 드러난다.

권진규는 1959년에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덕성여대 미술대학 등에서 강의를 하면서 국내와 일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순수작품 활동 이외에 일본에서는 마네킹 제작일을 하거나 귀국해서는 영화 「이순신」의 세트 제작을 맡기도 했다. 그는 동양과 서양의 고대 미술품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당대 미술계의 현대화를 주도했던 초상 조각의 격랑에 휘둘리지 않고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고수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참고문헌

『권진규』(최열, 마로니에 북스, 2011)
『근대문화유산 조각분야 목록화 조사 보고서』(문화재청, 2011)
「순수성과 영원성을 빚어낸 조각가 권진규」(김이순, 『시대의 눈』, 학고재, 2011)
「권진규평전」(박형국, 『권진규전』, 도쿄국립근대미술관, 무사시노 미술대학 자료관, 국립현대미술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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