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에 유채. 세로 71㎝, 가로 51㎝.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서진달은 대구 출신으로, 1934년 4월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유화과에 입학하여 1939년 3월에 졸업하였고 이 사실이 당시 『매일신보』의 졸업생 명단에 실렸다. 『매일신보』에는 소조과로 오기되었다. 이 작품은 도쿄미술학교 유학시 제작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나부」의 우측 상단에 “小(소), 二(이), 徐(서)”라고 써있는 것은 도쿄미술학교의 서양화 교수인 고바야시 만고[小林萬吾, 1870~1947]의 수업시간 중 2학년 때 서진달이 그린 것이라는 뜻의 서명으로 본다. “徐(서)”라는 한자 서명은 입학 직후 1934년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여성 누드 작품인 「나부(裸婦)」에도 사용되었다. 앞의 2라는 숫자가 2학년을 의미한다면 이 작품의 연대는 현재 통용되는 1937년 보다는 이른 것으로 봐야 한다. 예과 1년을 거친뒤 본과 2학년이라면 1936년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여성 누드는 세부적인 묘사에 치중한 것이 아니라 인체의 각 부분을 기하학적인 면으로 구분하여 구조적으로 채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의 기법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도는 193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여성 누드 작품인 「나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아서 학년이 올라가면서 새로운 시도를 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이후에 세잔의 묘사법을 발전시키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세잔 기법의 시도는 그의 지도교수 화풍의 영향은 아니고 개인적인 시도로 보인다. 고바야시 만고의 양식은 외광파(外光派)적인 색채로 일본의 풍속과 풍경을 즐겨 그린 정통파 계열이었다.
서진달은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시장의 한 모퉁이(市場의 一角)」라는 제목으로 대구 시내 풍경을 그린 수채화 작품을 입선시키면서 화가로 등단했다. 수채화로 풍경을 그리는 방식은 1930년대 대구의 향토회(鄕土會)를 중심으로 한 서양화가들이 즐겨 사용했던 것이다. 서진달은 정식으로 향토회에 전시를 한 기록은 없으나 서동진, 이인성 등의 대구 향토회 그룹과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32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풍금을 연주하는 소녀를 그린 수채화 「소녀탄주도(少女彈奏圖)」는 좋은 평을 받았는데, 김주경은 “풍금을 타는 어린 여성의 얼굴에는 세악(世惡)을 모르는 순결과 인정, 미적 매력을 감추었다”고 했고 나혜석은 “구도로 보든지 필치로 보든지 뎃상으로 보든지 소품으로 성공이고 그 익숙한 솜씨는 장래를 기대하게 되었다”고 격려했다. 1933년에도 나이 든 노동자를 그린 「인물」을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유학시기 가운데 1935~36년에는 출품, 입선작이 확인되지 않으나 1937년의 입선작 「실내(室內)」는 조선 여성이 화로를 앞에 두고 실내에 앉아있는 뒷모습을 담은 유화 작품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 이광수가 “황의의 조선 여성과 조선식 청동 화로를 통하여 소위 조선식 정서를 영묘하게 표백한 화재에 놀랐다”고 지적했으나 조각가 김복진은 이를 피상적인 향토색 회화의 예로 들어 비판하기도 했다. 유학을 마친 1939년에는 「시작나체(試作裸體)」를, 1940년에는 「스토브」를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귀국 후에는 대구의 계성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42년에는 만주 하얼빈 공과대학에서 가르쳤고 개인전도 열었다. 해방 후 1945~47년에는 부산 용두산 공원 제일교회 옆에 서진달미술연구소를 세우고 미술교습과 연구소를 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