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의 정기적인 수행기간인 여름·겨울 석 달씩의 안거(安居)와는 달리, 어떤 목적을 이룰 때까지 오랫동안 행하거나 1만 일 등의 기간을 정해 놓고 행하는 경우를 말한다.
중국의 대표적인 결사(結社)로는 402년에 동진(東晋)의 승려 혜원(慧遠)이 행한 염불결사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극락왕생을 위한 염불결사에 국한되어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 정신대왕(淨神大王:神文王이라는 설이 많음)의 태자 보천(寶川)의 제의로 강원도 오대산에 설치된 오대사(五臺社)가 최초의 결사로 보인다. 보천에 의하면 오대산은 백두산의 큰 줄기로서 각 대(臺)는 진신(眞身:부처님을 말함)이 상주(常住)하는 곳이다.
오대는 동서남북의 사방에다 중앙을 합하여 부른 것이다. 그리고 각 대마다 방(房)과 당(堂)을 설치하고 그 안에 청·적·백·흑·황색의 색깔을 배정하여 별개의 불보살(佛菩薩)을 그려 봉안하였다.
불교도들은 이곳에서 신행결사를 조직하여 낮에는 불경을 독송하고 밤에는 예참(禮懺)을 행하였다. 동대의 관음방(觀音房)에는 관세음보살을 주존불로 봉안하고 낮에는 ≪금광명경 金光明經≫·≪천수경 千手經≫ 등을 외웠으며, 밤에는 관음예참(觀音禮懺)을 행하였다. 이 동대의 결사 이름은 원통사(圓通社)였다.
서대의 미타방(彌陀房)에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을 주존불로 봉안하고 낮에는 8권의 ≪법화경≫을 외웠으며, 밤에는 미타예참(彌陀禮懺)을 행하였다. 이 서대의 결사 이름은 수정사(水精社)였다.
남대의 지장방(地藏房)에는 지장보살을 주존불로 봉안하고 낮에는 ≪지장경≫과 ≪금강반야경≫을 외웠으며, 밤에는 점찰예참(占察禮懺)을 행하였다. 이 남대의 결사 이름은 금강사(金剛社)였다.
북대의 나한당(羅漢堂)에는 석가모니불을 주존불로 봉안하고 낮에는 ≪불보은경 佛報恩經≫과 ≪열반경≫을 외웠으며, 밤에는 열반예참(涅槃禮懺)을 행하였다. 이 북대의 결사 이름은 백련사(白蓮社)였다.
중대의 진여원(眞如院)에는 비로자나불을 주존불로 봉안하고 낮에는 ≪화엄경≫과 600번 ≪반야경≫을 외웠으며,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행하였다. 이 중대의 결사 이름은 화엄사(華嚴社)였다.
이 밖에도 오대산에는 매년 100일 동안 화엄회(華嚴會)를 열었던 법륜사(法輪社)가 있었다. 이들 결사의 경비는 하서부(河西部:지금의 강릉) 안에 있는 8주(州)의 세금으로 충당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오대산의 결사는 화엄사상에 입각한 통불교적(通佛敎的)인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 나라의 본격적인 염불결사는 758년(경덕왕 17)에 발징(發徵)이 승려 31인, 향도(香徒) 1,000여 명과 함께 금강산원각사(圓覺寺:현재의 乾鳳寺)에서 미타만일회(彌陀萬日會)를 결성한 것을 효시로 삼고 있다.
이 결사의 구성원들은 정성껏 염불 정진하는 한편, 농사를 짓는 등의 뒷일에도 전력하였다. 이 결사는 29년 만에 1만 일을 채웠으며, 결사를 마친 날 발징과 31명의 참가자가 함께 허공을 날아 극락으로 갔다고 한다.
그 뒤 808년(애장왕 9)에는 강주(剛州)의 미타사(彌陀寺)에서 선사(善士) 수십 명이 1만 일을 기약하고 염불결사를 하였는데, 그들 가운데 아간(阿干) 귀진(貴珍)의 여종 욱면(郁面)이 815년(헌덕왕 7)에 왕생하였다고 한다.
또 982년(성종 1)에는 성범(成梵)이 비슬산 도성암(道成庵)에 만일미타도량을 열어서 50여 년을 부지런히 수행하였는데, 이 때에는 20여 명이 함께 결사하였다. 이와 같은 만일결사는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서 발징이 독창적으로 창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한편 고려에서는 중국의 백련사와 같은 염불결사를 본받아서 행해진 예도 있다. 문종의 비인 인예태후(仁睿太后)는 결사할 것을 발원(發願)하였고, 의천(義天)은 중국 백련결사 18현(賢)의 진용(眞容)을 모셔 극락왕생의 업(業)을 닦아 인예태후의 명복을 빌고자 하였다.
그 뒤 1129년(인종 7)에는 법상종(法相宗)의 승려 진억(津億)이 지리산에 오대사(五臺寺)를 지어 수정결사(水精結社)를 열었다.
이 결사에는 3,000여 명이 참여하였으며, ≪점찰업보경 占察業報經≫에 의해 선악을 점찰참회(占察懺悔)하여 극락왕생을 기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사의 이름을 수정결사라고 한 것은 무량수불상 앞에 수정 1개를 놓고 신인(信因)을 밝혔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불교 신행결사는 고려 중기의 고승 지눌(知訥)이 일으킨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와 요세(了世)가 일으킨 만덕산(萬德山)백련사(白蓮社)이다. 지눌은 1185년(명종 15)에 크게 깨친 뒤, 팔공산 거조사(居祖寺)로 가서 정혜사(定慧社)를 결성하고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함께 닦을 것을 주장하였다.
1200년(신종 3)에는 송광산 길상사(吉祥寺)로 옮겨 결사를 계속하였는데, 1204년(희종 즉위년)에 왕은 친서로 제방(題榜)을 내려 이 결사를 ‘조계산수선사(曹溪山修禪社)’라 하였다.
지눌이 길상사로 옮긴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11년 동안 선(禪)을 닦는 결사를 이끌어 가자 위로는 왕족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정혜결사에 입사(入社)하는 이가 줄을 이었다.
지눌은 항상 선을 토대로 하되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함으로써 대부분의 선승(禪僧)들이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미끼로 하여 편파적으로 불교 교리를 외면하던 것을 적극 지양하였다.
또한, 수선사에 입문한 사람들로 하여금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경절문(徑截門)의 세 가지 방법으로써 선정과 지혜를 함께 갖추도록 가르쳤고, 불경으로는 ≪금강경≫·≪육조단경 六祖壇經≫·≪대혜어록 大慧語錄≫ 등을 권하면서 읽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수선사를 중심으로 한 선종이 크게 일어났으며, 그 전통은 고려 말기까지 수선사 16국사(國師)를 배출하면서 계속 이어졌다.
특히, 수선사 제4세(世) 혼원(混元)은 최우(崔瑀)가 창건한 강화 선원사(禪源寺)의 주지가 되어 교세를 떨치게 됨에 따라 선원사는 수선사의 별원이 되었으며, 또 수선사의 선풍(禪風)이 국가와 연결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요세의 백련결사는 전라남도 강진 만덕산에 백련사를 창건하고 1232년(고종 19)에 보현도량(普賢道場)을 열어 1236년에 백련결사문(白蓮結社文)을 발표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원래 요세는 지눌 밑에서 수년 동안 선을 공부했지만, 천태종풍(天台宗風)의 부활을 위한 독특한 결사를 조직했던 것이다. 백련결사문이 발표되자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이 백련사에서는 대중들이 ≪법화경≫을 읽고, 또 법화삼매참(法華三昧懺)을 닦았으며, 극락왕생을 희구하여 ‘나무아미타불’을 소리내어 1만 번씩 외우는 것을 일과로 삼아 매일 실천하였다.
이 백련사에서는 요세 이후 8국사가 배출되어 대를 이어 나갔으며, 특히 제2세인 천인(天因)과 제4세인 천책(天頙)이 백련사 사주(社主)로 있을 때 더욱 교세를 크게 떨쳤다. 그리고 제7세인 무외(無畏)가 개경 묘련사(妙蓮寺)의 주지가 됨에 따라 이 절은 백련사의 별원 구실을 하게 되었다.
수선결사(修禪結社)와 백련결사에는 약간의 성격적인 차이가 있다. 수선결사가 조계종의 선을 수행하는 모임인 데 대하여 백련결사는 천태종의 법화행법(法華行法)을 닦는 모임이며, 수선결사가 지해(知解)를 가지고 스스로 발심(發心)할 수 있는 의욕적인 인간을 참여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데 대하여 백련결사는 나약한 범부를 대상으로 하여 죄장참회(罪障懺悔)와 타력염불(他力念佛)로써 해탈을 얻을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이 밖에 고려시대의 신행결사로는 보암사(寶巖寺)와 연화원(蓮華院)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본격적인 신행결사라기보다는 신도들의 모임과 같은 것이었다.
보암사에서는 60세가 넘은 40여 명의 퇴관 노인들이 매월 8·14·15·23·29·30일의 6재일(齋日)에 모여서 ≪법화경≫을 서로 돌아가며 읽고 담론하는 한편, 15일의 재일에는 밤을 새워 가며 극락왕생을 위한 염불을 하였다. 연화원에서도 매월 6재일에 같은 모임이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노소의 구별 없이 개경의 남쪽 주민들이 모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초기와 중기에는 강한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공개적인 불교 신행결사를 조직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 시기에는 깊은 산중에서 소수의 승려들이 모여 죽기를 각오하고 해탈을 위한 용맹정진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의 신행결사는 대체로 후기에 많이 이루어졌는데, 대부분이 극락왕생을 위한 염불결사였으며, 건봉사와 망월사(望月寺)의 만일회(萬日會)가 유명하였다.
특히, 건봉사의 만일회는 전후 3회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처음은 순조 때인 1801∼1834년까지 용허(聳虛)가 주관하였고, 두번째는 철종 때인 1850∼1863년까지 벽오(碧梧)가 주관하였으며, 세번째는 만화(萬化)가 1881년에 시작하여 1908년에 마쳤다.
근대 이후에도 양산통도사 등 큰 사찰에서는 염불결사를 비롯하여 수선결사, 대장경 연구를 위한 부분적인 결사가 이루어졌다.
현재는 한 번 들어가면 6년·10년 등을 기한으로 하여 일체 외부의 출입까지를 금하는 특별 수선결사가 일부 사찰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참여 인원은 극소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