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미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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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
단체
중국 후한 말에 장릉(張陵)이 창시한 도교의 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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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중국 후한 말에 장릉(張陵)이 창시한 도교의 교단.
내용

그보다 앞서 성립된 태평도(太平道)와 함께 도교의 조형(祖型)을 이룬다. 장릉은 만년에 유교를 버리고 장생법을 배워 구정단법(九鼎丹法)을 터득하였고, 쓰촨[四川]에 있는 학명산(鶴鳴山)에서 도서(道書)의 저술과 수도에 전념한 끝에, 여러 신들에게서 ‘신출정일맹위법(新出正一盟威法)’을 전수했다고 한다.

오두미도라는 명칭은 입교자로부터 쌀 5말씩을 받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장릉이 죽은 뒤 손자인 장로(張魯)가 뒤를 이어 오두미도의 교법과 조직을 완성시켰다.

오두미도는 천사도(天師道)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장릉의 손자인 장로가 장릉을 천사라고 호칭한 데에서 연유한다. 장로는 그의 아버지를 사사(嗣師), 자신을 계사(系師)라고 불러서 할아버지·아버지·손자가 법계(法系)를 계승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들을 합쳐서 삼장(三張)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권3 보장봉로조(寶藏奉老條)에 인용된 ≪고려본기≫에 따르면 중국의 무덕(武德)·정관(貞觀)연간(618∼649)에 고구려인들이 다투어 오두미도를 신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7세기 전반기에 고구려에서 유행하였다면 중국에서 시작된 시기보다 거의 5세기가 지난 시기가 되기 때문에 그 들어온 경위가 문제가 된다.

지금으로서는 전개과정과 원인을 상세하게 알 수가 없지만 6세기 초에 중국에서 성행하고 있던 천사도가 중국의 연안지대를 거쳐 고구려에 전파된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오두미도가 고구려의 민간에서 신봉되기 위해서는 신도들을 관리하는 조직이나 기구가 존재해야 했을 것이고, ≪도덕경 道德經≫의 독송, 삼관수서의 시행, 부적과 기도를 통한 질병치료 등이 실시되었을 것이지만 그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추측할 수가 없다.

다만 중국에서 오두미도가 성립된 뒤, 신천사도와 같은 정비된 도교가 발생하기 이전에 이미 고구려에 전파되어 원래의 거친 형태가 거의 변화 없이 신봉되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당나라 고조(高祖)가 고구려인의 오두미도 신봉 이야기를 듣고는 마치 오두미도가 신봉될 가치가 없다는 듯이 중국의 도사와 천존상(天尊像)을 고구려에 보냈다는 것이 특별히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참고문헌

『삼국유사(三國遺事)』
『한국도교사상연구』(차주환, 동화출판공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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