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촉나라 장군 관우(關羽)의 신명(神明)을 숭배하는 것으로 신호(神號)를 관왕(關王)·관성제군(關聖帝君)·관제야(關帝爺)·산서부자(山西夫子)·개천고불(蓋天古佛)·협천대제(協天大帝)·복마대제(伏魔大帝)라고도 한다.
산시성 윈청현(山西省運城縣)에서 태어난 관우는 유비(劉備)·장비(張飛)와 결의형제를 맺고 의리와 무용으로 널리 알려져, 일찍이 당나라 때부터 무신(武神)으로 존숭되어 오다가, 1614년 명나라가 ‘삼계복마대제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三界伏魔大帝神威遠震天尊關聖帝君)’이라 봉호(封號)한 뒤부터 민간에 널리 유포되게 되었다.
호국신앙을 비롯하여 불교·유교 등 다양한 성격이 혼합되어 있으며, 청나라가 중국 동북부에서 군사를 일으킨 이래 관제의 신령스런 도움이 있었다 하여 황실의 수호신으로 숭배된 뒤부터는 관성묘(關聖廟)가 없는 마을이 없을 정도로 전국적으로 신앙되었다.
유교신으로 숭배될 때에는 “산동의 한 분 『춘추(春秋)』를 짓고, 산서의 한 분 『춘추』를 읽네.”라고 하듯이, 그를 문형성제(文衡聖帝) 혹은 산서부자·관부자(關夫子)라 하여 오문창(五文昌)의 한 분으로 모신다.
불교신으로 숭배될 때에는 『삼국지연의』에 관제가 죽은 뒤 적토마(赤兎馬)를 타고 “내 목을 돌려 달라.”고 하며 옥천산(玉泉山)에 이르렀을 때, 보정(普靜)의 “그러면 네가 죽인 수많은 사람은 어찌 되는가.”라는 물음 아래 대오(大悟)를 했다고 하여 관제보살(關帝菩薩)·가람보살(伽藍菩薩)이라 부르며, 사원의 수호신·호법신(護法神)으로 모신다.
민간에서는 관제를 사로잡은 위나라 조조(曹操)가 금은보화를 주어 환대했으나, 밤에 그것들을 남기고 유비의 부인만을 보호하며 떠났던 사실에 근거하여 재신(武財神), 재난을 사전에 알리는 신, 무례를 범하지 않는 신, 정성으로 빌면 죽은 자를 되살리는 신, 지옥의 장관, 천계(天界) 남대문의 수호신 등으로 숭배된다.
청나라 말기에 관제는 백성묘(白城廟)에서 ‘충용신무영우인용위현당국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관성대제(忠勇神武靈祐仁勇威顯讜國保民精誠綏靖翼贊宣德關聖大帝)’, 월성묘(月城廟)에서는 ‘삼계복마신위원진천존(三界伏魔神威遠鎭天尊)’이라는 도교의 신명으로 숭배되었고, 제사에 있어서도 석가(釋迦)·관음(觀音)과 같은 격으로 상승되었다.
우리 나라에는 고래로부터 문학작품을 통하여 관제가 숭배되어 왔으나, 신앙적으로는 임진왜란 때에 파견된 명나라 군사들에 의하여 전래되었다. 명나라군이 왜군을 격퇴시킨 것을 관제의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보고, 각 처에 관성묘를 짓고 국가의 수호신, 민간의 재신으로 모셨다.
1796년(정조 20)에는 『경신록언석(敬信錄諺釋)』, 1876년(고종 13)에는 『남궁계적(南宮桂籍)』, 1879년에는 『과화존신(過化存神)』, 1880년에는 『삼성훈경(三聖訓經)』, 1882년에는 『경석자지문(敬惜字紙文)』, 1883년에는 『관성제군명성경언해(關聖帝君明聖經諺解)』, 1884년에는 『관성제군오륜경(關聖帝君五倫經)』 등의 관제신앙에 관한 한글 전적들이 간행, 유포되었다.
관제신앙의 집단으로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숭인동에 위치한 전래의 동묘(東廟)와 김진하(金振河)가 1945년 3월 충청남도 논산군 두마면 계룡산 아래에 창교한 무량대도(無量大道)가 대표적이다.
무량대도는 『각세진경(覺世眞經)』과 『명심경(明心經)』을 소의경전으로 하며, 관제의 위력을 빌어 국운융창(國運隆昌)을 기하고 피폐한 인륜도덕을 바로 세우려는 것이 목적이며, 신앙의 대상은 관제를 중앙으로 하여 천부천황(天父天皇)·상제(上帝)·사두성군(四斗聖君)·산왕대신(山王大神)·사해용왕(四海龍王)을 모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