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양(英陽). 호는 격암(格庵). 역학(易學)·참위(讖緯)·감여(堪輿)·천문(天文)·관상(觀相)·복서(卜筮) 등 모든 학문에 두루 통달하였다.
일찍이 이인(異人)을 만나 공부하다가 진결(眞訣)을 얻어 비술(祕術)에 정통하게 되었고 앞일을 정확하게 예언하기도 하였다. 명종 말기에 이미 1575년(선조 8)의 동서분당(東西分黨)을 예언하였고, 임진년(1592)에 백마를 탄 사람이 남쪽으로부터 나라를 침범하리라 하였는데 왜장 가토(加藤淸正)가 백마를 타고 쳐들어왔다.
자신의 생사문제까지 예언하였던 그는 풍수지리에 많은 일화를 남겨 그의 이름으로 된 도참서(圖讖書)인 『남사고비결(南師古祕訣)』과 『남격암십승지론(南格庵十勝地論)』이 『정감록(鄭鑑錄)』에 전한다. 그러나 이 저술들이 남사고가 직접 저술한 것인지 아니면 위탁되어 후대에 쓰인 것인지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전자에서는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한산한수(漢山漢水)가 다골다탄(多骨多灘)하여 골육상잔의 화가 많을 것을 말하는 등, 각종 재난을 예언하였다. 후자에서는 정감록사상의 특징인 십승지지, 이른바 재난이 일어날 때 피신처인 열 군데의 보길지(保吉地)를 구체적으로 예언, 기술하였다.
죽은 뒤 1709년(숙종 35)에 울진의 향사(鄕祠)에 배향되었으며, 편저에 『선택기요(選擇紀要)』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