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학설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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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
개념
수련파 도인들이 선약을 만드는 외단에 대한 집념에서 탈피하고, 수련으로 공행을 쌓고 몸 안에 단을 이룩하는 내단 수련에 관련된 도교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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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수련파 도인들이 선약을 만드는 외단에 대한 집념에서 탈피하고, 수련으로 공행을 쌓고 몸 안에 단을 이룩하는 내단 수련에 관련된 도교설화.
내용

수련을 통하여 공행을 쌓아서 몸 안에 단을 이룩하는 일을 일반적으로 단학이라고 부른다. 본성에 연결시킨 단학의 기본 이론은 김시습(金時習)의 용호(龍虎)에 관한 해설에 잘 해명되어 있다.

정기(鼎器:솥)에 납과 수은을 넣고 거기에 불을 지펴 두 가지 광물이 날아가거나 흩어지지 않고 하나로 합치되도록 만드는 것이 금단(金丹)을 연조하는 방법인데, 이것을 상징적인 것으로 취해서 인체에 적용시켜 풀어나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정기는 사람의 몸인데 머리는 건(乾)이 되고 배는 곤(坤)이 되며 배꼽 아래 한 치 서 푼의 자리에 있는 단전(丹田)이 그 중심이 되므로 단전을 기준으로 하여 몸을 안정시킨다. 납과 수은은 용호에 비기는데, 그것은 인체에서 행하여지는 일호일흡(一呼一吸)인 호흡이다. 이 일호일흡을 잘해서 우주의 원기(元氣)를 훔쳐다가 체내에 단을 이룩한다.

지피는 불은 복이(服餌), 즉 양생을 위한 식물로 잡는다. 그 복이로 복호항룡(伏虎降龍:호랑이와 용을 항복시킴.)하여 하나로 병합하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몸의 자세를 제대로 잡아서 숨을 법도에 따라 바로 쉬면 된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러한 기본적인 방법 외에도 여러가지 금기 내지 술법이 있기는 하다. 이러한 단학은 장생불로하는 신선으로 변화하는 것을 중심으로 삼으므로, 자연 그것에 관련된 설화가 많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단학설화로 간주할 수 있는 기사는 각종 만록(漫錄:일정한 체계 없이 붓 가는 대로 쓴 글)에 흩어져 있으나, 그 중 홍만종(洪萬宗)이 엮어 지은 『해동이적 海東異蹟』이 가장 규모를 잘 갖춘 것으로 들 수 있다. 32항 38인의 이적을 여러 책에서 뽑아서 인물별 시대순으로 배열하고 엮은이의 안어(按語)와 평설(評說)을 달기도 하였다.

다루어진 인물은 단군(檀君)·박혁거세(朴赫居世)·동명왕(東明王)·사선·옥보고(玉寶高)·김소이선(金蘇二僊)·대세구칠(大世仇柒)·참시(旵始)·김가기(金可記)·최치원(崔致遠)·강감찬(姜邯贊)·권진인(權眞人)·김시습·홍유손(洪裕孫)·정붕(鄭鵬)·정수곤(丁壽崐)·정희량(鄭希良)·남추(南趎)·지리선인(智異僊人)·서경덕(徐敬德)·정렴(鄭磏)·전우치(田禹治)·윤군평(尹君平)·한라선인(漢拏僊人)·남사고(南師古)·박지화(朴枝華)·이지함(李之菡)·한계노승(寒溪老僧)·유형진(柳亨進)·장한웅(張漢雄)·남해선인(南海僊人)·장생(蔣生)·곽재우(郭再祐) 등이다.

이들이 모두 단학에 조예가 깊어서 이적을 나타낸 것은 아니나, 그 기사가 대체로 단학을 연상시키는 성질의 것들이다.

신라 후기의 유당학인(留唐學人:당나라 유학생)들에 의하여 중국에서 수련 중심의 도교가 전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들 중에서 김가기는 백주등선(白晝登仙)한 인물로 전해진다. 그에 관한 기록은 중국의 도교전적인 『운급칠첨(雲笈七籤)』의 「속선전(續仙傳)」에 들어 있는데, 그에 관한 기사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당나라 대중(大中) 11년(857) 12월 홀연히 표문(表文)을 올려 말하기를, “신은 옥황상제의 조서를 받들어 영문대(英文臺)의 시랑(侍郎)이 되었습니다. 내년 2월 25일에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당나라 선종(宣宗)은 대단히 이상하게 여겨 중사(中使)를 보내어 궁중에 들라고 불렀으나 고사하였고, 옥황상제의 조서를 요구하였으나 다른 신선이 관장하여 인간세상에 남겨두지 않았다고 하여 거절하였다.

마침내 궁녀 4인과 향약(香藥)과 금채(金綵)를 내리고, 또 중사 2인을 보내어 시중을 들게 하였다. 김가기는 조용한 방에 홀로 거처하여 궁녀와 중사는 거의 접근하지 못하였다.

매일 밤중이면 방안에서 내객과 담소하는 소리가 나서 중사가 몰래 들여다 보면 다만 선관(仙官)과 선녀가 각각 용과 봉 위에 앉아서 엄연하게 마주보고 있어 궁녀와 중사가 호들갑을 떨 수 없었다.

2월 25일 봄 경치가 아름답고 꽃이 활짝 폈는데, 과연 오색 구름 속에서 소리치는 학과 나는 난새와 생소(笙簫)와 금석의 풍악과 깃, 수레지붕에 경옥바퀴를 한 수레가 나타났고 깃발이 하늘에 가득 찼으며 신선의 의장대가 극히 많은 가운데 하늘로 올라갔다.

조정의 여러 관원과 사서인 등 구경하는 자들이 골짜기를 넘치도록 메운 채 바라보고 절하며 감탄하면서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해동이적』의 김가기 기사에도 이것을 그대로 옮겨 기록하고 있다.

최치원도 신라에 수련 중심의 도교를 전파한 주요 인물 중의 하나이다. 그에 관한 기이한 설화는 많으나 김가기의 경우같이 등선(登仙: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감.) 사실이 역력한 설화는 남기지 않았고, 다만 그가 식구를 거느리고 가야산에 들어가 숨어 살다가 어느날 아침 집을 나가 수풀 속에 갓과 신발을 버리고 없어져 버려 그것이 상빈(上賓), 즉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김시습은 그의 괴벽과 기행으로 이미 범상한 인간이 아님이 세상에 알려졌고, 또 유·불·도 3교의 어느 것을 신봉하는지조차도 분간할 수 없게 처신하였다. 그러나 우리 땅의 수련 중심 도교의 도맥에서는 중시조격 지위에 있으며, 장생불로하는 신선이 되는 묘리를 터득한 사람으로 여겨져 신선과 관련된 설화까지 낳았다.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김시습에 관한 한 가지 기사가 있다. 김시습이 강원도 양양 땅의 설악산에 은거하고 있을 때, 강릉 사람인 최연(崔演)이 뜻을 같이하는 젊은이들 5, 6인과 함께 김시습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으나, 다 거절하고 유독 최연만은 가르칠 만하다고 머물러 있게 하였다. 최연은 반 년 동안 사제간의 도리를 다하고 자나깨나 곁에서 떠나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달이 높이 뜨고 밤이 깊어질 때 잠을 깨어 보면 김시습이 간 곳이 없고 잠자리가 비어 있었다. 최연은 속으로 괴이하게 여겼으나 감히 추적해서 찾을 수가 없어 그대로 있고는 한 것이 여러 차례였다.

어느날 저녁 달이 또 밝아지자 김시습이 옷을 차려 입고 몰래 나가는데, 최연이 멀리서 그 뒤를 밟아갔다. 큰 골짜기 하나를 지나고 재를 하나 넘자 숲이 우거져 있어 그 사이로 살펴 보았다.

재 아래에는 사람들이 앉을 만한 큰 반석이 있고,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객 두 사람이 김시습과 인사를 나누고 반석에 앉아 이야기를 하였다. 거리가 멀어서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랜 시간 후에 그들이 헤어지자 최연은 먼저 돌아와서 본래대로 자리에 누웠다.

그 이튿날 김시습은 최연을 보고 “처음에는 너를 가르칠 만하다고 여겼으나 지금 네가 조바심하여 가르칠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말하고 그를 쫓아버렸다. 김시습이 밤중에 만나 이야기한 자들이 사람인지 신선인지 끝내 알아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김시습이 선관들과 담소한 듯한 여운을 남기는 설화이다.

김시습은 그 뒤 두타승(頭陀僧:떠돌면서 수행하는 승려)이 되어 홍산(鴻山:지금의 부여에 있는 산)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는데, 임종 때 화장하지 말라는 유언이 있어 승려들이 임시로 절 곁에 매장하였다가 3년 뒤에 제대로 매장하기 위하여 그 관을 열어보았더니 안색이 살아 있는 것 같아 그가 시해(尸解:몸만 남기고 혼백이 빠져 나가서 신선이 됨.)한 것이 아닌가 하고들 여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단학설화 중 수련을 통하여 공행을 쌓아 가는 힘들고 괴로운 과정을 설명한 것들이 있다. 그리고 재주가 비상하면서 그것을 세상에서 펴 보지 못하고 요절한 것을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것으로 나타낸 것도 있다. 남궁 두는 조선 명종 때 도예(道藝)를 배울 목적으로 치상산(雉裳山)에 가서 한 장로를 만나 지도를 받고 체내에 단을 이룩하는 수련을 하게 되었다.

그는 장로의 말대로 수련을 쌓은 끝에 단전이 충만해 오고 배꼽 밑에서 금색의 광채가 나는 듯하였다. 그는 금단이 이루어진 것이 기뻐서 그만 빨리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발동하여 급작스럽게 단전에 힘을 주어 황화(黃花:빛깔이 누런 꽃)를 발하게 하였더니 금단이 망가져 버려,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고 밖으로 뛰쳐 나갔다.

장로는 지팡이로 그의 머리를 때리고 틀렸다고 탄식하며 뒷수습을 해서 그의 심기를 안정시켜 주었다. 장로는 이어 “자네는 신태(神胎)는 이룩하지 못하였으나 지상선(地上仙)은 될 수 있으니, 약간 양생을 하면 800세의 수는 누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일러 주었다.

그는 장로의 내력을 물어 그가 의상(義湘)의 도맥을 승계한 권진인임을 알았고, 그 장로를 졸라서 배꼽 밑의 신태를 구경할 수 있었다. 장로가 어둠 속에서 아래에 싸인 것을 풀자 금빛이 대들보를 쏘듯이 비치고, 그 빛이 하도 휘황하여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을 정도여서, 놀란 남궁 두는 바닥에 넙죽 엎드려 버렸다.

조선 중종 때 장원급제하여 전적 벼슬까지 지냈다는 남추에 관한 설화도 단학설화의 한 가지 특색을 나타내는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도인에게서 수련술을 배우고 난 다음 대과에 급제하였는데,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곡성(谷城)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이적을 많이 일으켜 사람들의 주의를 끌면서 지내다가 30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염습하여 입관시켰다가 관을 들어 보니 너무 가벼운 듯하여 열어 보았더니 빈 관이었다. 그 안에 “창해에서는 배 간 자취 찾기 어렵고, 청산에서는 학 날아간 흔적이 안 보인다.”라는 시구가 적혀 있었다.

밭가는 사람들이 공중에서 풍악소리가 들려서 쳐다 보니 남추가 말을 타고 흰 구름 속을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에도 언급되어 있다.

단학설화에는 술사(術士)의 괴술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들어 있다. 전우치는 신광한(申光漢)과 내왕하였던 사람으로 전해지는데, 태백산의 여우한테서 영전(靈詮)과 비기(祕記)가 적힌 소서(素書)를 얻어 그 일부를 익힌 끝에 여러 가지 환술(幻術:도술)을 부리게 되었다.

한번은 신광한의 집에서 내객들과 함께 있을 때 천도(天桃:하늘나라에 있다는 복숭아)를 얻어낼 수 있느냐는 말을 듣고, 그는 새끼 수백 사리(뭉치)를 공중 구름 밖으로 던져 올려놓고, 동자를 시켜 그 새끼를 타고 올라가 새끼가 다하는 곳에서 벽도(碧桃:仙境에 있다는 과실)를 따오게 하였다.

동자가 새끼를 타고 공중으로 올라갔는데, 잠시 후 벽도의 잎과 열매가 마당에 떨어졌다. 좌객들이 다투어 그 벽도를 집어 먹었는데 그 단물의 싱그러움이 속세의 복숭아가 아니었다.

그런데 공중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전우치는 놀라며 “복숭아 한 알을 먹으려고 동자의 목숨을 없앴다.”고 말하였다. 천도를 지키는 자가 상제(上帝)에게 고하여 동자를 죽인 것이라고 했다. 그러던 중 팔 한 짝이 땅에 떨어지더니, 또 한 팔이 뒤이어 떨어지고 양다리와 몸뚱이와 머리가 떨어졌다.

좌객들이 아연실색하고 있는 가운데 전우치가 천천히 걸어가 동자의 시체를 수습하여 이리저리 이어 붙였다. 한참 후에 동자가 툭툭 털고 일어나 비틀거리며 가버렸다.

그런데 전우치는 그 뒤 괴술로 군중을 현혹시킨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태수가 내어다 묻게 하였는데 친척들이 이장하려고 파내어서 관을 열어 보았더니 빈 관이었다. 그 일이 있은 다음 전우치를 만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전우치와 같은 때의 사람으로 역시 도술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윤군평은 이인(異人)을 만나 『황정경(黃庭經)』을 전수받아 수련법을 터득하였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과식을 삼가라고 경고하면서, 모든 질병은 음식을 절제하지 않는 데서 생긴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늘 찬 철편(鐵片:철 조각) 4매를 가지고 번갈아 가며 양겨드랑이에 끼고 있었는데, 잠깐 사이에 철편이 불같이 뜨겁게 달아 올라 식은 것으로 갈아 끼워야 하였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편안하지가 않았다. 추위나 더위를 가리지 않고 늘 목욕을 해서 어깨와 등을 식혔으며 동짓날에도 우물물 한 동이를 등에 부어야 견디었다.

80여세에 죽었는데 시신이 너무 가벼워서 수의만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윤군평이 시해하였다고들 말하였다는 것이다. →단학

참고문헌

『매월당집(梅月堂集)』
『용호비결(龍虎秘訣)』
『해동이적(海東異蹟)』
『어우야담(於于野談)』
『열하일기(熱河日記)』
『시화와 만록』(차주환 편역, 민중서관, 1966)
『한국도교사상연구』(차주환,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78)
집필자
차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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