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문서응봉사(文書應奉司) · 별감제조(別監提調) ·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을 역임하였다. 도교에 조예가 있어, 도교를 좋아하던 태종의 총애를 받았고, 1408년 10월 이후 서장관으로 여섯번이나 중국에 다녀왔다.
당시 그는 소격전제조(昭格殿提調)를 겸직하고 있었는데, 태종의 명에 의하여 중국에 가서 도교의 초사(醮祀) 등 도교의식을 배워왔고, 또 동남동녀를 거느리고 광연루(廣延樓) · 상림원(上林園) 등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1413년 4월, 태종은 부친상중에 있는 그에게 수진(修眞 : 장생불로의 수련법)에 관해서 물어보기도 하였다. 1416년 천추사(千秋使)로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는데, 젊어서는 정몽주(鄭夢周) · 이색(李穡) 등과 교유하였다.
세상에서는 그의 관대한 성품과 솔직함을 높게 평가하여 팔청(八淸)의 우두머리라고 칭하였고, 또한 초서와 예서에도 매우 능하였는데, 양주의 회암사(檜巖寺)에 있는 묘엄존자무학선사탑비(妙嚴尊者無學禪師塔碑)와 한산에 있는 한산군이색신도비(韓山君李穡神道碑)는 그의 필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