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산(光山), 초명은 구이(九二), 자는 자구(子具), 호는 연계(蓮溪). 광주(光州) 출신. 자혜부윤(慈惠府尹) 회조(懷祖)의 아들이다.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한 뒤, 친종호군(親從護軍)·우사간(右司諫)·예조전서(禮曹典書)·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대사헌·경연관(經筵官) 등의 관직을 거쳤다. 1390년(공양왕 2)에 개성의 5부와 각 도의 목(牧)·부(府)에 있는 유학교수관(儒學敎授館)에 원자와 종실의 자제들이 입학하도록 상소하였고, 1392년(태조 1)에는 정몽주와 내란을 음모하였다는 혐의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되었다가 복직되었다.
1404년(태종 4)에 태종이 성수초례(星宿醮禮)를 상정(詳定)하게 하자 도관(道觀:도교 사원)인 태청관(太淸觀)의 보수와 천황대제(天皇大帝)의 재초(齋醮:도교의식의 하나인 하늘·땅·별에 지내는 醮祭)도 함께 진언하였다.
이에 대해 권근(權近)·하륜(河崙) 등이 반대하자 고려시대의 사례를 들어 도교신앙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으며, 또 같은 해 계품사(計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 여진족과 영토문제를 해결하였다. 이 공로로 태종은 밭 50결을 하사했다.
1407년에 옥사(獄事)에 걸려 구금되었다. 그러나 도교를 깊이 신봉한 태종은 그를 아주 버리지는 않고, 소격전(昭格殿)의 제조(提調)로 삼아 도교에 관한 자문을 구하였다. 1411년에 태종이 다시 도교의 신인 삼성(三聖)과 주작(朱雀)·대국(大國)에 관해서 하문하자, 고려의 전례를 들어 주작은 시좌궁(時坐宮) 남쪽에 단을 설치하도록 건의하고, 삼성과 대국도 폐지함이 불가함을 주장하였다.
1415년에 ≪성수경 星宿經≫을 태종에게 올렸다. 같은 해에 하륜이 그의 박학함을 높이 평가하여 육조판서에 봉하도록 상소하였으나, 태종은 과거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 형제와 무리지어 불충한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1417년 태종에게 사전(祠典) 제정의 명을 받았으나, 그 이듬해 죽었다. 유교의 기반이 굳혀지는 조선 초기에 도교의 부흥을 위해서 노력한 인물이었으며, 또 불교에도 관계가 있어 문묘(文廟)의 석전(釋奠: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에 쇠고기를 못 쓰게 하여 유사(有司)의 탄핵을 받은 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