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

유교
개념
초인간적 세계와 관련된 신념이나 의례 등으로 구성된 문화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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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종교는 초인간적 세계와 관련된 신념이나 의례 등으로 구성된 문화현상이다. 초월적·절대적 존재에 대한 경험과 신앙에 기반을 둔 교의·의례·시설·조직을 갖춘 사회 집단이 형성되는 문화현상이다. 기복·구도·개벽을 인간의 3대 종교적 염원으로 파악하는데, 우리의 경우 주술·기복적 사상이 근간이 되는 신화적 종교가 그 시초였다. 이후 유교·불교와 같은 고도의 이론을 갖춘 종교가 유입되면서 구도형의 종교문화가 정착했고 사회혼란기에는 구도·개벽형 종교가 출현하기도 했지만 기복에 대한 염원은 근원적인 뿌리로서 그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다.

정의
초인간적 세계와 관련된 신념이나 의례 등으로 구성된 문화현상.
개설

종교는 정치 · 경제 · 사상 · 예술 · 과학 등 사회의 전 영역에 깊이 관련되어 있는, 절대적이며 궁극적인 가치 체계로서 기능해 왔다.

그러나 종교는 절대성 · 궁극성이라는 자기 주장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발전 단계를 반영하고 있는 구체적인 문화 현상이다.

종교라는 말은 원래 근본이 되는 가르침을 의미하는 불교어였다. 그런데 그 말이 19세기 말 일본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서양의 ‘religion’의 번역어로 쓰이게 되면서 일반화된 것이다.

‘religion’의 어원은 라틴어의 ‘religio’로서,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외경의 감정과 그것을 표현하는 의례 등의 행위를 의미한다.

고대 유럽에서는 기독교권의 성립과 함께 교의(敎義)와 의례의 체계를 갖춘 종교 집단을 가리키는 개념이 되었고, 중세에는 비세속적인 수도원 생활까지도 이 개념으로 불렸다.

현재 ‘religion’의 번역어로서의 ‘종교’는 불교 · 기독교 · 이슬람교 · 유교 등의 개별 종교들을 총칭하는 유(類)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상식적으로 종교는 신이나 부처 등 초자연적인 존재에 관한 신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종교의 기본 요소는 신 · 부처 · 영(靈) · 법 · 원리 · 도 등으로 불리는 초월적 · 절대적 존재에 대한 체험이다. 종교는 이러한 종교 경험을 핵으로 하여 그러한 경험을 공유하고 또한 공유하고자 하는 일정한 공동체(종교 집단)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에 도달하기 위한, 혹은 그런 절대 경험을 서술하기 위한 교리적 · 이론적 체계를 갖는다. 또한 기도, 예배, 수양 등 궁극적 실재와 만나거나 합일(合一)하기 위한 실천 체계를 갖는다.

여기서 종교는 인간이나 자연의 힘을 초월하는 존재에 대한 경험에 기반을 둔 교의 · 의례 · 시설 · 조직을 갖춘 사회 집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현상으로서의 종교는 역사의 발전 단계나 민족적 · 문화적 전통의 차이에 따라 현저한 다양성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논자의 관점과 대상에 따라 종교에 대한 엄청난 수의 정의가 시도되고 있다.

이 정의들을 크게 세 가지 계통으로 나누어 보면, ① 신이나 절대자 등과 인간과의 관계로서 보는 정의, ② 신성감, 외경의 감정 등 종교에서 보이는 특정한 심리 상태를 기준으로 하는 정의, ③ 특정한 가치 체계를 갖춘 인간의 생활 활동으로서의 정의가 있다.

종교에 대한 이 세 가지 정의 가운데 어느 하나가 옳다고 판단내리기는 어렵지만, 인간의 삶의 영위로서 종교를 파악하는 견해가 좀더 포용적인 정의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종교의 역사적 소임, 이데올로기적 특징 등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관점을 동시에 도입하여야 한다.

종교는 원시 시대에서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발전과 함께 그 사회적 · 문화적 기능을 달리하면서 전개되어 왔다. 현상적으로만 보면, 문화와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 관여했던 봉건 사회 이전에 비해서, 현대 사회에서 종교는 그 활동 범위가 좁아졌고, 종교 본래의 영역에 한정되어 온 경향이 있다.

한국 종교사의 체계

종교는 하나의 문화현 상이므로, 객관적인 역사 단계에 상응하는 발전 단계를 구체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역사적 발전과 그에 상응하는 종교 문화의 특질을 서술하는 것이 한국 종교사다.

종교학자 윤이흠(尹以欽)은 종교적 신념 체계의 유형(types of belief system)이라는 정신적 동기를 한국 사회의 역사적 변천과 결합시켜 한국 종교사의 체계를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는 종교적 신념 체계의 유형을 ① 기복형(祈福型), ② 구도형(求道型), ③ 개벽형(開闢型)의 세 가지로 나눈다. 이 세 가지 유형은 각각의 사상적 동기 및 사회 · 윤리적 태도를 보여 준다.

① 기복형 : 사상 내용에서 현실적 · 현세적이다. 현실 조건과 사회 질서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극단의 문화적 · 사회적 보수주의로 드러난다.

② 구도형 : 개인의 고행과 자아 완성을 통한 진리 추구가 제일의 목표이다. 결과적으로 사회 질서의 유지를 묵인하는 보수주의적 성향으로 드러나기 쉽다.

③ 개벽형 : 현존의 사회 조건에 불만을 가지고 이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급진적 태도를 가진다. 급진적 사회 개혁주의를 보여 준다.

기복 · 구도 · 개벽의 3대 동기는 인간의 종교적 염원의 3대 범주로 파악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종교적 신념 유형은 각각 혹은 둘 이상이 상호 작용하면서, 또는 시대마다 각 신념 유형이 그 강도를 달리하면서 한국 종교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 드러난다.

① 삼국 이전 : 세계 종교가 유입되기 이전 한국 종교 문화의 유형적 특징은 주술적 기복 사상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② 삼국 시대 : 유교나 불교와 같은 고도의 이론을 갖춘 종교가 유입되면서 기복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주술적 현세주의가 극복되고 구도형의 고전 문화로 이행되어 간다.

③ 후삼국 시대 : 고대 사회가 붕괴되는 전환기로서, 변혁에의 광범한 요구와 함께 신라 말에 개벽 이념형의 대표라 볼 수 있는 미륵 사상이 정치적으로 전면에 대두된다.

④ 고려시대 : 유교와 불교가 대립과 조화를 꾀하는 시대였다. 이때 민간 신앙을 깊이 수용한 불교는 ‘기복-구도형’의 신념 유형을 형성하여 고려 불교의 특징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유교는 정치적 개혁 의지와 결합. ‘구도-개벽형’의 사상을 형성해 정치 체제의 이념으로 자리잡게 된다. 고려 중기 이후에 유입된 성리학은 이러한 역사적 책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조선 왕조의 개국 이념으로 발전해 간다.

⑤ 조선 전기 : 성리학이라는 ‘구도-개벽형’의 신념 유형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은 안정된 왕조 권력의 이데올로기로서 점차 개벽적인 모티브를 상실한다.

⑥ 조선 후기 : 성리학의 ‘구도-개벽형’의 사상을 회복하려고 하는 실학 운동과, 원래 유교가 결여하고 있던 기복적 요소가 표출된 ‘개벽-기복형’의 동학 운동이 나타난다.

한국 종교사는 개별 종교 전통들의 병렬적 합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국 종교사를 연구 · 서술하는 데에서는 다양한 신념 유형들의 복합적 상호 작용 현상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한국 종교의 역사적 전개

상고대의 원시신앙

개국 설화 및 시조 설화

한국의 가장 오랜 원시 신앙의 내용과 형태는 고조선 시대로부터 고대 부족 국가의 형성기인 삼국 시대 초기에 걸친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개국 설화 및 시조 신화에 나타난다.

신화나 설화는, 비록 구전되어 내려오는 것이지만, 고대인들이 생활하면서 형성한 신앙 의식의 표현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한국 고대의 원시 신앙을 구명할 수 있다.

한국 고대 신화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요소 중의 하나는 하늘[天]을 지고신(至高神)의 존재로 의식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단군 신화의 환인(桓因)은 ‘하늘' 또는 ‘하느님'이라는 우리말의 음역(音譯)이며, 환인의 아들로서 태백산에 하강한 환웅(桓雄)도 ‘하늘'이라는 발음에 가깝다.

따라서, 우리 민족에게는 단군 신화의 형성기에 이미 지고신으로서의 ‘하늘'에 대한 신앙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천신은 지상적(至上的) 내지 초월적 존재로서 피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그것은 능동적으로 인간의 세계에 하강하여 세상을 다스리거나(光明理世) 혹은 인간을 이롭게 한다(弘益人間)는 임무를 실현하려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천신의 현현(顯現) 내지 하강은 고대인의 신앙 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단군 신화에 보이는 바와 같이 천신이 인간으로 화신하여 출현하는 것은 신화의 결정적인 계기인 것이다.

천신은 그 자체가 인간으로 성육(成肉)하지 않더라도 햇빛[日光] · 번개[電光] · 붉은 구름[紫雲] 등으로 나타난다. 심지어는 꿈속에 나타나 계시를 하기도 한다. 또, 고대인의 신앙 속에서 표현되는 천신의 현현은 흔히 세계 안의 구체적이고 자연적인 현상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고대 한국인의 신앙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태양 · 산악 · 나무 · 숲 · 신단(神壇) 등에 대한 숭배 현상은 그것이 천신의 구체적 현현으로, 혹은 신이 하강하거나 거주하는 곳으로 생각되어, 생명력의 상징으로서 신성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된 결과였다.

고대인의 신앙 대상으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던 땅[大地] · 물[水] 등도 신화에서는 여성적 생산력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주몽 신화에서는 하백(河伯)의 딸이 웅심산(熊心山) 아래 압록강에 살며 거기에서 천제(天帝)의 아들을 만났던 것이다.

이러한 고대 한국인의 신앙 속에서의 궁극적 대상은 신성성을 현현하는 모든 구체적 자연 대상의 위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하늘이다.

하늘은 자연의 모든 신앙적 대상의 신성성을 확보해 주는 근원이며, 신화 속에서 인간의 육신으로 출현하여 국가의 시조로 숭배된다. 시조의 강생 신화는 곧 국가 질서를 최고의 신적 존재에 근거시키고 있는 것이다.

제의와 무속

고대 한국인의 신앙은 제의를 통하여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제의는 신화의 신앙 내용을 현실 속에 실천하는 행위이며 신화적 이념의 실현인 것이다.

고구려의 동맹이나 예의 무천은 모두 가을에 추수를 마치고 드리는 제사였다. 제사의 대상은 주로 천신이었던 것 같으나, 아마도 천(天)으로 상징되는 국조신 및 그 밖에 제사의 목적에 관련되는 다른 대상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 당시의 제사 방법이 어떠했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집단적인 가무 · 음주는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의례를 통하여 신과 인간과 자연 사이에 조화와 질서가 이루어져 세상이 밝게 다스려지는 이상 세계가 실현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또, 고대 한국인의 원시 신앙은 현재까지도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이어져 내려 오고 있는 무속과 거의 일관된 사고 구조와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점에서 일반적으로 한국의 원시 신앙은 한국 무속의 원형으로 생각되고 있다.

삼국시대의 종교

원시 신앙의 쇠퇴

삼국 시대에 들어와 국가다운 제도와 조직이 마련되고 중국으로부터 불교 · 도교 등이 수용됨에 따라 상고대의 원시 신앙도 변모되었다. 제정 일치 시대인 상고대에는 부족의 족장은 사제인 동시에 왕이었다. 이는 고대 조선의 부족 사회를 거쳐 신라 초에 이르기까지도 그대로 이어져 무(巫)는 왕이었고 왕은 바로 무였다.

그러나 고대 국가로 발전돼 가면서 제사와 정치는 분리되고, 무는 종교적인 제의를 전문으로 담당하는 직업으로 독립되었다.

삼국 시대의 무는 제사를 집행하는 외에도 의술 · 예언 등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무가 의술로써 질병의 치료를 담당하는 의무(醫巫)의 직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나, 미래의 일 또는 미지의 사실에 대하여 예언하는 점복적(占卜的)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자주 보인다.

삼국 시대에 이르면, 그 이전에 전래되어 오던 무격신(巫覡神)이 분화되어 다양해졌다. 이에 대한 증거가 연오랑(延烏郎)세오녀(細烏女)의 설화다.

그러나 삼국 시대 무속 신앙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남방적 성격을 띤 해양 문화의 용 신앙(龍信仰)이 크게 보급되었다는 사실이다. 신라 문무왕이 임종 때 호국의 대룡(大龍)이 되어 불법과 나라를 수호하겠다는 유언을 한 것도 용 신앙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을 알려 주는 한 증거다.

또, 삼국 시대에는 천하대장군으로 알려진 장승이 벌써 액(厄)과 잡귀를 막는 촌락 수호신의 기능과 경계를 구분하는 소임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삼국 시대의 무속 신앙은, 왕권이 불교와 밀착하여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 · 장려하게 되자, 그것이 차지했던 지위를 점차 불교에 넘겨 주게 되었다.

그 뒤 무속 신앙은 불교 · 도교 등 외래 종교와 타협, 조화되면서 역사의 표면에서보다는 사회의 저변에서 한국 문화의 성격이나 한국인의 행동 양식을 결정하는 데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유교의 수용

삼국은 모두 가부장적 가족 제도가 발달하고 전제적 왕권이 성장함에 따라 충과 효의 덕목을 요구하였고, 따라서 사회 도덕으로서의 유교를 중요시하였다. 삼국 시대에 들어와 유교가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372년( 소수림왕 2)에 태학을 세우고, 태학 박사를 두어 귀족 자제에게 오경을 비롯한 유교의 경전을 가르쳤다. 그리고 평양 천도 뒤에는 각 지방에 경당(扃堂)이라는 사립 기관을 둬 평민 자제들에게도 경전과 활쏘기를 가르쳤다.

백제에서도 오경 박사와 의(醫) · 역(易) 박사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유교 교육 기관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백제는 아직기(阿直岐) · 왕인(王仁) 등이 유교를 일본에 전파할 정도로 유교 수준이 매우 높았다. 왕인은 일본에 『논어』『천자문』을 전했으며, 백제는 그 뒤에도 자주 일본에 오경 박사를 보내곤 하였다.

신라는 삼국 통일 후인 682년( 신문왕 2)에야 국학을 세워 유학을 가르쳤으므로 백제나 고구려에 비하여 뒤떨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진흥왕 순수비에서 충과 신을 장려하는 것이나,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세속오계에 충과 효가 강조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미 법흥왕 무렵에 유교 도덕이 보급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화랑도들이 가장 중요시한 유교의 덕목은 충과 신이었다. 횡적으로는 신을 통해 사회적인 결합을 이루고, 그것이 다시 충을 통해 종적으로 왕권과 연결됨으로써 유교는 국민을 결합시키는 중요한 사회 도덕으로서의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유교는 삼국 시대의 신라에서 충과 신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결속 이념으로서 중요시되었지만, 통일 신라에 들어와서는 주로 6두품(六頭品) 출신의 유학자들에 의해 도덕 정치의 이념으로서 주장되었다.

불교의 전래와 발전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는 재래의 토착 신앙이 신앙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으나, 삼국이 고대 국가로 정비되면서 불교가 전래되어 국가적으로 공인되었다.

삼국이 고대 국가로 성장하여 왕권이 확립돼 갔음에도 불구하고 신앙 면에서는 각 부족이 성장한 지역을 토대로 산천 숭배나 조상 숭배가 여전해 고대 국가의 완성에 장애가 되었기 때문에, 국왕은 부족 간의 개별적인 신앙을 초월한 새로운 국가적인 종교를 요청하였다.

이에 왕실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발전시키는 데 선봉적인 구실을 하였다. 불교가 고대 국가에서 정신적 지주로서 국민 사상의 통일에 적합했고 왕권의 강화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시대적 · 국가적 요청에 의해 전래된 불교도 토착의 무속 신앙을 전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불교는 뿌리 깊게 남아 있던 재래 신앙과 깊은 관계를 맺고 토착화의 길을 걸으면서 그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이 때문에 삼국 시대의 불교는 불교의 근본 정신과는 달리 재래의 현세적인 기복 신앙을 연장한 데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372년의 일이다. 중국의 전진왕(前秦王)부견(符堅)이 순도(順道)와 불상 및 불경을 고구려에 보내 왔으며, 2년 뒤에 아도(阿道)가 왔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세움으로써 불교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고구려의 불교는 삼론종(三論宗) 계통의 의연(義淵)승랑(僧朗) 등에 의하여 크게 발전하였다.

백제에는 384년에 인도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인도로부터 중국을 거쳐 들어옴으로써 불교가 전래되었다. 백제 불교는 계율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한국 율종(律宗)의 선구가 되었는데, 특히 여기에 공헌한 사람이 겸익(謙益)이다.

그는 526년 인도로부터 범본(梵本) 『오부율 五部律』을 직접 가지고 들어와 18명의 이름난 승려들과 더불어 율부(律部) 72권을 번역하였다.

고구려 · 백제의 불교는 일본에도 전해졌다. 고구려의 혜관(慧灌)은 625년 일본에 건너가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으며, 588년에는 일본의 선신니(善信尼) 등이 백제에 유학하여 율학을 배우고 돌아가 일본 율학의 시조가 되었다.

신라에는 눌지왕 때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에 의하여 불교가 전래되었다. 그러나 토착 신앙의 전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던 귀족들의 반대로 불교는 초기에 많은 저항과 박해 속에서 포교되었으며, 527년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비로소 공인되었다.

그런데 삼국의 불교는 장구한 역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도 불교의 교단이나 종파의 사상이 누구로부터 발단되었고 그 뒤에 어떻게 계승 · 발전되었는가 하는 계보적인 문헌이 거의 없다.

다만 누가 어떠한 종(宗)을 중국으로부터 수입하였으며, 누가 어떠한 경(經)과 논(論)을 주소(註疏)하였는가 등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한편, 신라에는 당나라에서 성립된 불교의 여러 종파가 수입되고 고승들이 배출됨에 따라 신라 통일기에는 교종(敎宗)의 오교(五敎)가 성립되었다.

이미 삼국 시대 말기에 고구려의 보덕(普德)에 의하여 열반종(涅槃宗)이, 신라의 자장(慈藏)에 의하여 계율종(戒律宗)이 성립되었으며, 통일 후에는 의상(義湘)에 의하여 화엄종(華嚴宗)이, 원효(元曉)에 의하여 법성종(法性宗)이, 그리고 진표(眞表)에 의하여 법상종(法相宗)이 각각 개창되었다.

이 다섯 종파는 모두 불교의 경전을 중요시하는 교종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를 흔히 ‘오교’라 한다.

원효의 법성종은 특히 역사의 흐름에 따라 각각 이론을 달리한 여러 종파를 화합하여 하나로 귀일하게 하려 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화쟁론(和諍論)이다. 화쟁이란 집착 없는 무애(無碍)의 입장에서 만법(萬法)을 보는 것으로서, 만법은 결국 하나로 귀일된다는 논리다.

원효의 화쟁 사상은 일반 민중을 중심으로 한 화합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까지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하향식 불교였는데 원효에 이르러 민중 불교로의 길이 열렸다고 할 수 있다.

원효는 또 정토종(淨土宗)을 통한 대중화에 노력하였다. 정토종이란 교리에 대한 깊은 연구 없이도 단지 ‘나무아미타불’만 외워도 죽은 뒤 서방정토(西方淨土)에 갈 수 있다고 믿는 신앙이다. 이러한 현실 부정적이고 대중적인 정토종의 유행이 신라 불교의 한 특징이다.

9세기부터는 선종(禪宗)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선종은 경전의 연구에 주력하는 교종과는 달리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이심전심(以心傳心)’과 ‘견성성불(見性成佛)’에 의한 깨달음에 주력한다.

선종이 처음 전래된 것은 7세기 중엽이었으나 8세기 후반부터 신행(神行)과 도의(道義) 등의 활동으로 교세가 확장되어 마침내 9개의 종파를 형성하였다. 이것이 바로 선종 구산(禪宗九山)이다.

불교는 이 밖에 학문과 예술의 발전에 큰 구실을 하였다. 일찍이 구법승(求法僧)들의 내왕을 통하여 중국의 발달된 문화를 수입하여 학문 발전에 큰 구실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상 · 탑 · 조각 등 한국의 예술 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도교의 전래

중국으로부터 우리 나라에 도교가 전래된 것은 삼국 시대 말기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도교적인 문화 현상으로 볼 수 있는 산악 신앙이나 신선설 및 각종의 방술(方術)이 행해지고 있었다.

고구려에는 624년( 영류왕 7)에 당나라 고조(高祖)가 도사와 천존상(天尊像) 및 도법(道法)을 보내어 정식으로 도교가 전해졌다. 이 때에 고구려에 온 도사는 『도덕경』을 강론했는데, 왕 이하 일반인 수천 명이 이를 청강하였다. 643년( 보장왕 2)에는 연개소문의 건의에 따라 당나라로부터 8명의 도사를 맞이했다. 왕은 불교 사원을 도관(道館)으로 변조했으며, 도사를 유사(儒士)보다 높이 대우했고, 도사들은 국내의 명산 대천을 진호(鎭護)하는 재초(齋醮)를 행하였다.

그런데 북위(北魏)의 구겸지(寇謙之)에 의하여 정비된 신천사도의 원형인 오두미도(五斗米道)가 크게 신봉되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도교는 영류왕 훨씬 이전부터 고구려에 수입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 도교가 언제 전래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노장 사상 및 신선 사상 등은 일찍부터 전해 오고 있었다.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近仇首)가 고구려군을 크게 무찌르고 추격하여 수곡성(水谷城)에 이르렀을 때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도덕경』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무모한 추격을 중지하도록 한 것을 보면, 이미 4세기 중엽 이전에 도가 사상이 백제에 들어와 있던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도가 사상과의 접촉은 삼국 중 백제가 가장 빠른 것이 된다.

백제의 와전(瓦塼) 중에 산경문전(山景文塼)으로 불리는 것은 삼신산(三神山)과 도관(道觀) 및 도사를 표현하고 있어 신선 사상 내지 도교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신라의 도교 전래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738년(효성왕 2)이지만 도교적인 문화 현상은 삼국 중 가장 현저했다.

신라 때에는 선풍(仙風)이 크게 성행하고 선가(仙家)의 인물이 많았다. 시조 혁거세(赫居世)를 선도성모(仙桃聖母)가 낳았다는 전설, 이른바 신라의 4선(仙) 또는 참시선인(旵始仙人) · 물계자(勿稽子) 등에 관한 신선 설화가 전해 오며, 화랑도를 국선(國仙) 또는 선랑(仙郎)이라 부르는 것 등은 모두 도교적인 사상과의 연관을 보여 준다.

특히 최치원(崔致遠)은 우리 나라에 고래로 유 · 불 · 도를 포함하는 현묘한 도가 있는데, 그것을 ‘풍류(風流)’라 하며 그 사실이 『선사 仙史』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중국의 도교와는 다른 우리 고유의 선도(仙道)가 전해 내려 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시대에는 또 도교 수련의 전통이 세워졌다. 최치원 · 이청(李淸) 등은 당나라에 들어가 김가기(金可紀)로부터 단술(丹術)을 배우고 그것을 국내에 전파했다. 최치원은 도맥을 후세에 전해 준 인물로 추앙되었다.

고려 시대

무속 신앙

고려 시대에 민중들의 의식을 지배해 온 신앙 중의 하나는 유교 혹은 불교가 수용되기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무속 신앙이다. 무속 신앙은 시대 전반에 걸쳐 민중 의식의 저변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고려를 창건한 태조는 불교와 함께 무속에 기대어 건국 과업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태조 이후 고려의 역대 왕들도 무속적 신앙에 따라 정치 기능의 일부를 수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각종 의례나 종교적 행사에 있어서도 무속적 행사가 공식적으로 시행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고려사』에 300여 건이나 실려 있는 기우 행사(祈雨行事)였다. 기우 의식은 농경 사회에서 곡식의 풍요를 비는 행사인데, 고려조에서는 기우제에 무격(巫覡)이 동원되었다.

많을 때에는 무격이 300여 명이나 모여 의례를 갖추었다고 한다. 이러한 무의(巫儀)는 결과적으로 신의(神意)를 얻어 비를 내리게 함으로써 한재(旱災)를 면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어 국왕까지도 스스로 기우제에 나섰던 것이다.

무속의 제재초복적(除災招福的) 성격으로 인해 왕 및 왕족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까지 무격이 동원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산천에 사신을 보내어 태자의 병이 낫기를 빌기까지 하였다.

민간에서도 기자(祈子) · 초복(招福) · 제화(除禍) · 제액(除厄) · 구역(驅疫) 등을 위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 성황 신앙(城隍信仰)이 넓게 퍼져 있었다.

고려조는 또 덕적산 · 백악 · 송악 · 목멱산 등 4대 산을 정하여 무녀로 하여금 봄과 가을에 제사지내게 하였다. 이는 명산에는 산신이 머물러 있는 것으로 믿어서, 그 산신을 위로하고 제사함으로써 국가의 태평과 백성의 안전을 기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려 시대의 이러한 무속 신앙은 삼국 시대 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무격신은 분화되어 다양해졌고, 불교 · 도교 등이 전래되어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무속신앙은 이들 종교와 혼합되었다.

무와 불 · 도와의 혼합 현상은 앞서 말한 기우 행사에서도 볼 수 있다. 즉, 기우제에서 무사(巫事)가 치러지는 한편, 도교의 술사(術士)와 불승(佛僧)들에 의한 기우 행사도 함께 행해졌던 것이다.

유교의 발전

태조 때부터 국가의 통치 원리로 받아들여지던 초기 유학은 광종이 문치주의를 표방하고 과거제를 실시하여 유교와 한문학의 교양을 지닌 사람을 관리로 등용하기 시작하고, 성종 때 최승로(崔承老)의 건의에 따라 모든 의례를 유교의 예법에 따르게 하며, 국자감을 두어 유교 경전을 가르친 뒤로는 신라 시대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발전했다.

이 시기의 유학은 그 자체가 통치 질서의 이념으로 채택되어 발전되었므로, 주로 인간의 내면 정신 생활을 주도해 왔던 불교와는 크게 대립되지 않았다. 실제로 당시의 지식인들은 유교와 불교를 아울러 연마하는 자가 많았다. 이 점이 조선 시대의 유학자들과 다른 점이다.

유교의 발전은 문벌 존중의 풍조와 짝하여 사학의 발전을 가져 왔다. 문종 때 해동공자(海東孔子)라 불리던 최충(崔冲)은 구재학당(九齋學堂)이라는 사숙(私塾)을 만들어 9개의 전문 강좌를 두었으며, 그 문도를 최공도(崔公徒) 또는 문헌공도(文憲公徒)라 불렀다.

최충의 구재학당 이후 사학이 계속 발전하여 사학 12도(徒)가 생겨나 관학(官學)의 침체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에 예종은 관학이 떨치지 못함을 염려하여 국학에 칠재(七齋)와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고 궁중에 청연각(淸讌閣) · 보문각(寶文閣) 등을 두어 유교 경전을 연구하게 하였다.

안향(安珦)은 충렬왕 때 원나라로부터 주자학을 도입하였다. 이 때부터 고려 후기의 유학은 고문 경학(古文經學) 중심에서 사서오경 중심으로 발전되면서 송나라의 성리학을 수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주자학은 인간의 본성과 우주의 이치를 밝히려는 철학적 성격이 농후한 유학인데, 의리와 명분을 존중하고 이단의 배척에 철저하였으므로 불교와의 마찰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고려 말기에 주자학 전래 초기의 이색(李穡) · 이숭인(李崇仁) 등은 불교 자체를 공격하지 않고, 단지 승려와 교단의 타락 등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정몽주(鄭夢周) · 정도전(鄭道傳) · 권근(權近) 등에 이르러서는 이론적인 측면에서 불교 배척론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불교 배척론은, 유교와 불교의 공통성과 차이점을 제시함으로써 당시 불교 사회를 유교 학술 사회로 전환시키는 교량 역할을 하고 있는 점에서, 종래의 배불론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불교의 발전과 폐단

삼국 시대의 불교는 왕권에 의해 뒷받침을 받아 국가 권력과 밀착, 그 그늘 밑에서 교세를 확장해 갔다. 이러한 삼국 시대 불교의 특징은 고려조에도 그대로 이어졌으며 그 호국적 성격 때문에 더욱 보호 · 장려되었다.

태조는 그의 건국 대업을 불법의 가호에 의한 것으로 확신하여 개경에 7층 탑, 서경에 9층 탑을 세웠으며, 개경에는 흥국사 · 왕륜사 · 법왕사 등 10여 개의 사찰을 세웠다. 태조가 불교를 보호, 권장한 이후 역대의 왕들도 숭불책을 추진하여 많은 사찰과 사탑이 건축되었다.

이러한 국가의 불교 보호는 승려의 사회적 지위도 보장하였다. 국가는 승려에 대한 출세의 길을 마련하기 위하여 승과(僧科)라는 국가 시험 제도를 두었고, 사원에는 전지(田地)와 노비가 급여되고 면세와 면역의 특권이 베풀어졌다. 그리고 이 같은 보호와 장려 아래 사원과 승려의 속권(俗權)이 확대되어 승려는 귀족 신분을 이루었고 사원 경제가 팽창해 갔다.

그런데 고려의 불교는 이와 같이 외형상으로는 융성했으나 교리 자체의 발전은 별로 없었다. 이러한 불교계에 새로운 자극과 혁신을 불러일으킨 인물이 의천(義天)이다.

그는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송나라에 가서 화엄 교리(華嚴敎理)와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웠다. 귀국하여 교관겸수(敎觀兼修)를 내세워 교(敎) · 선(禪)의 대립을 해소하고 그 상의합작(相依合作)을 주장하여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천태종은 화엄종과 같은 교종에 속한 종파였지만, 교종으로서는 가장 진전된 사상 체계를 가졌다. 또, 그것은 과거의 불교를 정리하고 교와 선의 대립을 절충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것이므로 천태종의 성립은 과거의 불교에 대한 비판과 직결되었다. 의천의 출현은 고려 불교의 황금기를 가져 왔을 뿐만 아니라 실로 한국 불교사의 흐름을 전환시킨 계기를 마련하였다.

무신 집권 이후에는 선종이 크게 진흥되었다. 지눌(知訥)은 조계종이라는 독특한 선종을 창설하여 조계종의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다. 의천이 교종을 중심으로 교와 선의 일치를 주장하는 데 비해, 그는 선을 주로 하는 교와 선의 조화와 정(定)과 혜(慧)의 쌍수(雙修)를 추구하였다.

그의 교 · 선 조화의 구체적인 내용이 돈오점수(頓悟漸修)이다. 돈오는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임을 깨닫는 것으로, 그 방법은 좌선을 위주로 하여야 하나 때로는 염불이나 독경에 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곧 부처임을 깨닫는 돈오 이후에 점수(漸修)가 요청된다. 돈오 이전의 수행은 참다운 수행이 아니며, 점수란 돈오 이후에 부처로서 살아가는 수행을 일컫는다. 그 뒤 고려 불교계는 종래의 오교 · 구산 대신 오교 · 양종으로 개편되었다.

고려 불교의 특기할 만한 사실은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격퇴시키려는 염원에서 착수된 대장경의 조판이다. 대장경의 조판은 비록 국민의 막대한 부담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는 했지만, 동양의 불교 문화에 이바지한 공헌은 막중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고려의 인쇄술의 발달을 자극하여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를 만들어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고려 시대의 불교는 호국적 성격 외에도 현세 구복적인 특징을 지녔다. 팔관회 등은 국가와 개인의 현세적 행복을 구하는 구복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이것은 극락정토에 왕생한다는 내세적인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복락을 구하는 기복적인 것으로서 재래의 무속 및 도교 신앙과 결부된 것이다.

고려 불교는 국교로서 왕실과 귀족의 적극적인 비호 아래 성장하여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나, 그 세속화에 따른 사원의 무리한 확대와 사찰의 난립 및 고리대업의 성행 등 여러 가지 사회적 폐단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불교의 사회적 폐단은 고려 말에 새로이 전래한 주자학에 국가 이념으로서의 위치를 이양하게 된 한 원인이 되었다.

도교

무속 신앙 및 불교와 혼합돼 왔던 고려 시대의 도교는 주로 재앙을 제거하고 복을 비는 국가적 행사로서 고려의 역대 왕들과 민중들까지도 신봉하였다. 우리의 토착 민간 신앙에 이미 있었던 산악 신앙은 물론이고 천지 · 일월성신 등의 신앙은 그대로 고려에 계승되어 도교적 의례인 초제(醮祭)에 흡수되었다.

신라 때부터 시작된 팔관회는 고려에 이르러 그 내용이 도교적인 것에까지 확대되어 천령(天靈)과 오악(五岳)의 명산 대천을 제사하였다. 연등 행사도 뒤에 도교적 성격이 짙은 당악가무희(唐樂歌舞戱)를 도입함으로써 도불잡유(道佛雜糅)로 되었다.

고려 도교의 특징인 불교와의 이러한 혼합 현상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사례가 팔성당(八聖堂)의 건립이다. 인종은 묘청(妙淸)의 설에 따라 즉위 9년(1131)에 이중부(李仲孚)를 시켜 서경의 임원궁(林原宮)에 팔성당을 건립하고 거기에 팔선(八仙)의 회상(繪像)을 안치시켰다.

그런데 팔성당이라는 것은 도교가 불교의 여러 신격(神格)을 결합시켜 국내의 명산에 봉안한 것으로 우리 고유의 산악 숭배 신앙과도 혼합된 것이다.

교단 조직과 이론면에서 한층 완비된 본격적인 중국 송대의 도교가 우리 나라에 전래된 것은 예종 때이다. 도교를 독실하게 신봉한 송나라의 휘종은 고려에 도교를 전했다. 예종 또한 도교 신앙이 매우 깊어 도교 신상의 안치와 도관의 건설 등을 추진, 도교가 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하였다.

예종은 이중약(李仲若)의 건의에 따라 우리 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도관인 복원궁(福源宮)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이 곳에서는 송나라의 휘종이 보낸 도사에 의하여 양성된 고려의 도사들이 각종의 도교 의례를 집행하였다.

고려 사회에서는 도교의 초제 행사 외에도 수경신(守庚申)의 습속이 상하에 널리 행해졌다. 경신일(庚申日)에 수야(守夜)하는 것은 도교의 장생법(長生法)과 사과신적(司過神的) 신앙에서 출발한 것이다.

원종 때에는 궁중에서도 태자까지 참가한 대규모의 경신수야의 모임이 있었는데, 이것은 조선 시대에까지 계승되어 더욱 축제적인 행사로 변모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또 신라 말기의 도선(道詵)에 의하여 선전된 풍수 지리 사상이 크게 유행하였다. 풍수 지리설은 지리 도참설이라고도 한다. 이 사상의 영향으로 과거에 지리과(地理科)가 생겼으며,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을 두어 비보사찰(裨補寺刹)을 관장하게 하였다.

또, 도참 사상가인 김위제(金謂磾)의 건의로 숙종 때에 삼경제(三京制)가 나타났다. 명종 이후로는 삼경제 대신 삼소제(三蘇制)를 시행하여 3소에 이궁(離宮)을 짓고 왕이 순주(巡駐)하였다.

조선 전기의 종교

유교 지배의 확립과 발전

여말선초 왕권 교체기에 유학자들은 정도전 · 권근 등 두 왕조의 임금을 섬긴 자와 정몽주 · 길재(吉再) 등 절의를 지켜 조선조에 벼슬하지 않은 자로 구분되어 의리론이 조선 시대 유교의 중요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리고 정도전은 『조선경국전』 · 『경제문감』의 저술을 비롯하여 조선 사회의 통치 구조와 이념을 유교 이념에 의하여 정착시키려는 개혁 정책과 더불어 <불씨잡변 佛氏雜辨> · <심기리편 心氣理篇> 등 불교 교리를 이론적으로 비판하는 저술을 통하여 적극적인 불교 배척에 나섰다.

이 무렵 도교도 억압되어 초례소(醮禮所)가 폐지되고, 그 뒤 조광조(趙光祖)에 이르러 소격서(昭格署)까지 문을 닫았다.

의리론에 따라 훈구파에 대립하여 나타난 사림파는 길재 · 김숙자(金叔滋) · 김종직(金宗直)으로 학통이 계승되면서 성리학의 연마와 수양적 실천을 통하여 많은 제자들을 길러 초야에서 세력을 형성하였다. 성종 때에는 김굉필(金宏弼) · 정여창(鄭汝昌) · 김일손(金馹孫) 등이 관료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중앙의 관계에서도 세조의 왕위 찬탈 문제로 사육신과 생육신이 출현하였다. 이들이 보인 절의는 의리를 위하여 생명을 걸고 세속적 정치 권력에 저항하는 도학 정신의 발휘였다.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도 사림 출신인 김일손의 직필(直筆)이 발단이 되어 훈구 세력의 모함을 받는 데서 시작되었다. 중종 때의 기묘사화도 유교적 정치 이상을 실현하려는 조광조 등의 개혁적 정책에 반발하는 보수적 훈구 세력의 권력 투쟁에 사림 출신이 희생당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유교는 자기 완성의 학업이며[爲己之學], 홀로 있으면 선을 닦아야 하는 것[獨善其身]이지만, 자기의 구원으로 끝날 수 없고 모든 사람을 바르게 이끌어주는 법[治民方法]이요, 세상을 선하게 이룩하려는 것[兼善天下]을 지향한다.

따라서, 조선 시대 유학자의 이상은 자신의 덕을 밝혀 백성을 새롭게 함으로써 지선한 데까지 이르는 진지하고 엄숙한 도학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조광조 자신도 유교의 이상 사회인 요순 시대를 현재의 이 땅에다 실현시키려는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창하다가 세속적 세력에 희생되었던 참된 유교인였다. 조선 시대 사회는 이러한 유교적 정신을 존중하여 군왕에게도 선비를 특별히 우대할 의무가 부여되고 있었다.

제도적으로도 간관(諫官)은 직언으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언로를 확보하는 기관이다. 언로가 통하는지 막히는지가 국가의 안위에 가장 긴요한 것으로 인식되어 서민들의 여론까지도 반영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언관의 직책을 사림이 장악하여 무수한 희생을 겪으면서도 의리 정신에 입각한 직언을 함으로써 언관은 조선 사회가 지향하는 정당성과 이상의 규범을 제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황(李滉)이이(李珥)는 또한 도학의 내면적 깊이와 이론적 심화를 새로운 차원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성리학의 주요 문제로서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의 논쟁이 벌어져 유교의 학통은 대체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로 갈라졌다.

겉으로 보면 이러한 학파의 분열은 파벌을 조성하여 당쟁의 실마리를 이루고 무의미하고 관념적인 논쟁을 벌이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는 도학의 근본 과제인 인간의 심성을 철학적으로 구명하려는 요구와, 이에 상응하는 진지한 노력으로 충만되었던 때이며, 종교적 신념의 논리적 기반을 구축하는 시기라 볼 수 있다.

심성의 본질을 분석하면서, 선과 악의 근원, 선의 확장 등의 문제가 궁극적 관심이었다. 그 방법론의 입장에 따라 인심 내면의 도덕적 근원에 관심을 기울여 이기호발(理氣互發)을 주장하는 입장과 우주론적 체계에서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를 주장하는 입장의 양립을 보게 되었다.

이처럼 유교 철학의 이해가 심화될 때 유교 의례로서의 예학(禮學)도 정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리학 도입 초엽부터 정몽주에 의하여 3년 상제(三年喪制)와 가묘제(家廟制)가 도입된 이후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 의한 제도 논의와 권근의 『예기천견록 禮記淺見錄』을 통해 예학에 대한 관심이 성장하여왔다.

퇴 · 율 성리학의 절정 이후에 유학은 정구(鄭逑) · 김장생(金長生) 등의 예학파로 이어졌으며, 왕실의 상복 문제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기까지 하였다.

이황의 청원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사액된 이후 지방 유림에 의해 서원이 전국적으로 건립되어 선현에 대한 향사(享祀)가 유교 공동체의 기본 의례로 확대되었다.

상례의 오복제(五服制)와 종법제(宗法制) 및 가묘의 설치와 제사전에 따른 적서(嫡庶)의 구분, 입후(立後)의 제도 등 가족 제도가 정비되었다. 그리고 사직과 종묘와 문묘는 가족 단위의 가묘와 더불어 유교적 신앙 대상의 기본을 이루었다.

이익(李瀷)이 유술(儒術)을 이학(理學)과 예학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도 교리와 의례가 이념과 제도의 양면처럼 상호 필수불가결한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불교의 성쇠

조선을 창업한 태조는 독실한 불교도였다. 그는 즉위 후 조계종의 자초(自超, 無學)를 왕사로 삼고 천태종의 조구(祖丘)를 국사로 삼아 대장경의 인쇄를 완성하고, 조계종의 본사가 된 흥천사를 세워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태종 이후로는 적극적인 불교 억압 정책을 실시하였다. 70개의 사찰을 제외한 나머지의 사원과 재산을 강력히 제한하고 승려의 사찰 소유와 노비의 범위를 한정하였다. 종전 11개의 종단을 7개로 줄이고 왕사 · 국사의 제도를 폐지하였다. 국가가 승려에게 신분을 인정하고 병역 의무를 면제해 주는 제도로서 도첩제(度牒制)를 강화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 승려로 기화(己和)<현정론 顯正論> · <유석질의론 儒釋質疑論>을 지어 유교와의 적응을 모색하였다. 그는 유교의 ‘고요하면서 항상 감응함(寂而常感)’과 도교의 ‘하지 않으면서 하지 않음이 없음(無爲而無不爲)’을 불교의 ‘고요하면서 항상 비움(寂而常照)’의 논리와 비교하면서 세 종교의 회통을 주장하였다.

또한, 세종은 초기에 7종을 선 · 교 양종으로 통폐합시키는 등 불교를 억제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세종 자신이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여 유교인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궁중에 내불당(內佛堂)까지 지은 일이 있었다.

즉위 이전부터 독실한 신자였던 세조는 간경도감에서 각종 불교 경전을 출판, 번역하고 자신이 <영산회상곡 靈山會上曲> 등을 짓기도 하였다. 원각사 등 사원을 설립, 중흥하고 불교 문화 사업을 적극 펼쳤는데, 신미(信眉) · 수미(守眉) · 학조(學祖) 등은 이 때 활동하던 승려들이었다.

그러나 성종과 연산군으로 이어지면서 불교는 다시 배척받기 시작하여 염불소 · 간경도감 · 도첩제 · 승과, 양종의 도회소(都會所, 本寺) 등이 연이어 폐지되고, 심지어 승려를 관의 노비로 삼았다. 중종 때에는 사원의 토지를 향교에 편입시키고 사찰의 불상과 종을 병장기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등 심한 억압 정책이 전개되었다.

다른 한편,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은 유학자로서 불교에 입문하여 선과 화엄과 법화에 관한 저술을 남겨 불교에 대한 깊은 학문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대 인물로서 정심(正心, 碧溪)은 고려 보우(普愚)의 법맥을 이어 온 곤수(混修) · 구곡(龜谷) · 각우(覺雨)를 계승하였다. 정심을 이은 지엄(智嚴)은 여러 제자를 배출했는데, 특히 영관(靈觀)은 휴정(休靜)과 선수(善修) 등의 고승을 길러 면면히 법맥을 이었다.

또한, 명종 때 문정 왕후가 섭정하면서 불교는 중흥의 기운을 보였다. 곧, 백담사의 보우(普雨)를 봉은사에 맞아 들여 양종을 세우고 승과를 부활시켰으며 황폐한 사찰을 새로 일으켰다.

보우는 <일정론 一正論>을 저술하여 유교와 불교의 교리적 연관성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즉, 우주적 원리(一)와 인간의 도덕적 원리(正)를 대조시키면서, 불교의 화엄과 선 사상을 바탕으로 역과 중용의 원리를 융합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문정 왕후가 죽은 뒤 보우는 죽음을 당하고, 불교도 다시 억압을 받아 침체하게 되었다.

도교의 부침

유교 중심의 조선 사회에 들어 와서 유신(儒臣)들에 의하여 이단으로 규정됨으로써 도교는 그 규모가 크게 축소되기는 했지만, 왕실과 민간에서의 도교 신봉은 여전하였다.

특히, 왕실의 도교 신봉은 고려 시대에 못지 않아 도교 신전과 초제의 폐지를 둘러싸고 왕실과 유신들 사이에 심각한 대립을 일으켜 사화의 간접적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도학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었으며, 이 도학의 기본적 특징은 이단을 철저하게 배척하는 점에 있었다. 따라서 유학자 관료들은 도교의 여러 신전을 결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연히 도교 신전의 폐지를 끈질기게 건의하였고, 이에 조선왕실에서도 송도의 소격전 한 곳만을 남겨두고 모두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세조 11년에는 소격전이 소격서로 격하되었고, 중종 때에는 조광조 등의 끈질긴 반대로 소격서마저 잠시 폐지되었다. 그러나 중종은 기묘사화 뒤에 모후(母后)의 병을 구실로 유신들의 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소격서를 다시 부활시켰다.

그런데 이처럼 소격전을 소격서로 개칭하는 문제나 소격서의 폐지와 관련해 왕실과 유신들 사이에 벌어진 갈등의 이면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깃들여 있었다.

유학자들이 소격서의 혁파를 주장한 것은 물론 유학의 강한 벽이단 정신에도 근거하고 있지만, 실은 하늘에 대한 제사는 오직 천자만이 행할 수 있고 제후는 자기 구역 안의 사직 내지 산천에만 제사할 수 있다는 중국 중심의 모화적 사대주의에 입각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소격전에서 최고신인 옥황상제를 모시고 제사하는 것은 중화(中華)의 법도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유신들이 신전의 뜻을 가진 소격전을 관서의 의미인 소격서로 개칭한 것도 소격전의 신성성을 격하시키려는 의미에서였던 것이다.

한편, 왕실측에서 그렇게 끈질기게 소격전을 유지시키면서 계속 초제를 거행했던 것도 양재초복(禳災招福)이라는 생각만이 아니라, 초제를 통하여 최고의 신에게 직접 제사함으로써 내적으로라도 국권의 자주성을 확보하려는 심리가 작용하였기 때문이었다.

고려조에서 여러 가지 정치 문제를 일으켰던 지리 도참 사상은 조선 시대에 들어 와서도 크게 유행하였다. 태조는 하륜(河崙) 등의 학자들에게 풍수를 연구하여 새 도읍을 정하게 하였다.

지리 도참 사상이 이렇게 국가적으로 크게 중요시됨에 따라 민간에서도 각종의 비기(祕記)와 참위 술수에 관한 서적들이 만들어져 지리 도참에 관한 신앙이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태종 17년에는 참위서에 대한 금령(禁令)이 내려져 민간에 유포되어 있는 참위서를 회수하거나 소각하였다. 이것은 미신의 만연을 방지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러한 참위서에 의하여 혹시라도 역성 혁명과 같은 반란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조선 시대 도교의 특징은 종래에 주로 지식인들 사이에서 신봉되던 수련적인 도교인 단학(丹學)이 두드러지게 성장하면서 도맥을 형성했던 점이다.

조선 전기에 이루어진 『해동전도록 海東傳道錄』에는 도법을 전수한 인물과 그들의 저서가 많이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의 내용을 살펴 보면, 그 당시 조선 단학파의 계통이 종리권(鍾離權)에 연원을 둔 중국 전진교(全眞敎)의 계통임을 알 수 있다.

단학의 양생 사상은 또 조선의 의학 발전에 큰 구실을 하였다. 허준(許浚)에 의하여 편찬된 『 동의보감』은 우리 나라 최고의 걸작품으로서 중국과 일본에서도 크게 유행하였는데, 그 내용은 도교의 원리를 근본으로 해 의술을 논한 것이다.

조선 후기의 종교

실학의 대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사회적 혼란과 모순이 격화됨에 따라 유교는 그 이념과 현실적 적응 간의 괴리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학이 유교의 본래 이념인 도의 현실적 실현에 배반되는 공리 공담에 젖는 폐단으로 나타나자, 유학계 안에 새로운 학풍이 일어나 경세제민 · 실사구시 · 이용후생을 주창하는 실학파가 나타났다.

유형원(柳馨遠) · 이익 · 안정복(安鼎福) · 박지원(朴趾源) · 홍대용(洪大容) · 박제가(朴齊家) · 정약용(丁若鏞) · 김정희(金正喜) 등 실학자들은 경학 · 역사 · 지리 · 경제 등 다양한 방향에서 연구와 저술을 통해 활발한 학술 활동을 벌였으며, 때로는 반주자학적(反朱子學的) 입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가까운 데에서 먼 데로 나아가고 비근한 데에서 심원한 데로 추구하는 방법, 즉 존재의 선후론이 아니라 당위의 선후론을 존중하였던 인물들이다.

그러나 실학파의 입장은 주자학파와 모순된 것이라기보다는 새로운 방법의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박지원은 청나라의 요동 땅에 들어 가서 그 백성들의 규모 있는 생활 양상을 보자, “이용을 이룬 다음에야 후생을 할 수 있고, 후생을 이룬 다음에야 정덕(正德)을 이룰 수 있다”는 실학적 방법론을 제기하였다. 그가 지향한 것은 이용 · 후생의 방법을 수단으로 하고 정덕의 이념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었다.

실학파가 공리적 실질을 통해 주자학파의 의리 사상이 지닌 관념적이고 형식적인 허구성을 비판한 것은 의리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 기반이 없는 의리를 비판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의 공효를 추구하면서 사상을 사고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행동의 세계로 나오게 하였다.

그러나 실학 사상은 그 당시의 정책에 거의 반영되지 못하고 말았으며, 주자학적 정통성에 대한 대립 세력으로 성장하지도 못했다.

천주교의 전파

영 · 정조 시대로부터 천주교가 유교적 전통 사회에 전파되면서 하나의 커다란 사회 문제와 사상적 갈등을 보여 주었다. 특히, 실학파의 주류를 이루는 기호 남인의 일부가 천주교의 연구와 신앙 활동에 참여하자 유학계뿐 아니라 정부도 천주교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탄압을 가하였다.

이벽(李檗) · 이승훈(李承薰) · 이가환(李家煥) · 정약용 형제 등 당대의 명문 사족(士族)이 천주교 신앙에 입교하자 뒤따라 비판의 공격이 집중되어 이들은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그리고 정치적 권력 투쟁과도 얽혀 천주교 신앙을 배교하더라도 형벌을 면할 수 없었다.

더욱이 부패한 관료 계층에게 억압을 받던 하층 서민 속으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자 유교적 전통 질서가 위협을 받게 되었고, 이에 정부는 국법으로 모역죄에 해당시켜 천주교 신도들을 신유사옥 등으로 엄격하게 탄압하였다.

조선조 말기에는 이미 유교 이념의 진지한 도학 정신은 쇠퇴하고 도학 질서의 말폐가 극도에 달하여 사회 붕괴가 일어났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정착한 유교 체제는 제사를 거부하고 유교적 가족 윤리와 국가 윤리에 대해 이견을 내세우는 천주교를 가장 위험한 이단으로 배척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유교와 천주교가 갈등하는 초기에 정조는 천주교 신앙이 발생하는 이유를 유교 정신의 쇠퇴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유교 이념의 근원적 활력을 회복시켜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항로(李恒老)와 그의 제자 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 등은 천주교의 궁극 존재는 이가 아니라 기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이로서의 상제는 자기 스스로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형기(形氣)를 지닌 성인을 통해 증험(證驗)될 수 있다고 하였다.

양명학

한편, 우리 나라에 양명학이 들어온 것은 명종 때로 볼 수 있다. 다만, 이황이 <전습록논변 傳習錄論辨>을 통해 양명학을 이단으로 비판한 이래 표면적으로는 거의 논의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양명학은 최명길(崔鳴吉) · 장유(張維) 등의 글에서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고, 정제두(鄭齊斗)에 이르러 조선 유학 속에 양명학파가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실학파의 일부 인물에게도 이해되었다.

최근세에는 박은식(朴殷植)이나 정인보(鄭寅普)에게서 양명학적 입장의 계승과 재현이 이루어졌다.

불교의 중흥

불교는 선조 때에 이르러 묘향산에 주거하던 서산대사 휴정의 출현으로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그는 선풍(禪風)에 깊이 통달하여 선교 양종 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됨으로써 교종과 선종으로 구별되던 조선 불교를 통합, 선과 교가 일체임을 강조하였다. 곧 그는, 교는 부처의 말씀(佛語)이요 선은 부처의 마음(佛心)임을 지적하고 교와 선을 아울러 수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저술인 『선가귀감 禪家龜鑑』은 선종의 기본 정신을 집약적으로 밝혀 조선 불교의 선학에 지침을 제시하였다. 나아가 『유가귀감 儒家龜鑑』과 『도가귀감 道家龜鑑』이라는 삼가귀감(三家龜鑑)을 저술하여 유 · 불 · 도의 3교가 형식에서 차이가 있지만 한 마음을 밝혀 미혹한 데서 깨달은 데로 이끌어가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3교 회통론의 정신을 제시하고 있다.

휴정을 통하여 불교 교단의 내부적 통합을 이루고 선풍의 새로운 활력을 일으켜 유정(惟政) · 언기(彦機) · 태능(太能) · 일선(一禪) 등 도통을 계승한 고승들이 출현하였다.

또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산속에 숨어 명맥을 유지하던 승려들은 왜병에 항거하는 의병을 일으켰다. 묘향산에 있던 휴정은 팔도선교 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 되어 의승군(義僧軍)을 이끌었다.

그의 제자 유정은 금강산 및 관동 지역에서 일어나고, 영규(靈圭)는 청주와 금산에서 일어났으며, 처영(處英)은 지리산 및 호남 지방에서 일어났다.

그 밖에 의엄(義嚴) · 언기 · 경헌(敬軒) · 신열(信悅) · 일선 등의 휴정의 제자가 각처에서 분전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국가의 위기에 불교 교단이 국가 수호의 호국 정신을 발휘함으로써 사회적 내지 역사적 소임을 뚜렷이 하였던 사실은 조선 시대 불교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것이었다.

한편, 휴정의 동문인 선수(善修)도 명승이었다. 그는 장로(長老)에게서 득도하고 영관(靈觀)에게서 심법을 얻었으며, 그의 인품과 덕성이 널리 알려져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하여 융성한 선풍을 일으켰다.

그 중에서 각성(覺性) · 희언(熙彦) · 응묵(應默) · 희옥(希玉) · 성현(聖賢) · 인문(印文) · 담수(淡水) 등의 7파는 그의 선문을 더욱 번성시킨 한국 불교의 주역들이었다.

각성은 인조 때 팔도 도총섭이 되어 용맹을 떨치고, 그뒤 화엄사에 있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을 모아 항전하였다. 저술로는 『선원집도중결의 禪源集圖中決疑』 등이 유명하며, 그의 문하에서 수초(守初) · 처능(處能) 등 쟁쟁한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한편, 유정의 법맥은 응상(應祥)을 거쳐 명조(明照)로 이어졌다. 휴정의 문하 중 언기의 파가 가장 왕성하였는데, 그를 계승한 의심(義諶) 밑에서 정원(淨源) · 설제(雪霽) · 도안(道安) 등의 명승이 나와 화엄 교의의 교화에 주력하였다.

조선 불교는 외형적으로는 거의 국가의 통제 정책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종파와 교단이 타율적인 통폐합을 거듭해 오다가 휴정과 선수 이후 중흥의 기미를 보인 것은 분명히 선종의 계열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주력한 것은 화엄경의 연구였으므로 교학 중심의 면모도 띠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판승(理判僧, 工夫僧)과 사판승(事判僧, 事務僧)의 둘로 나뉘어지고 승려의 수행은 선 · 교 · 염불로 구분되게 되었다.

이 때 새 바람을 불러일으킨 이가 긍선(亘璇)이었는데, 그는 『선문수경 禪文手鏡』이라는 저술을 통하여 선을 조사선(祖師禪) · 여래선(如來禪) · 의리선(義理禪)으로 나누었다.

이에 대하여 의순(意洵)은 여래선과 의리선을 같은 등급으로 놓으면서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하여 그 제자들에게까지 선학에 관한 활발한 토론이 번져갔다. 한편, 염불로 미타정토(彌陀淨土)를 희구하는 신앙도 널리 퍼졌다.

승직에는 양종의 실무 대표인 판사(判事)가 있었는데, 명종 때 양종과 함께 폐지되었다가 선조 때 총섭의 직책이 나왔다. 그리고 승려의 기강을 관리하기 위한 승풍 규정소(僧風糾正所)가 있었다.

도교의 민간 신앙화

조선 전기에 걸쳐 왕실과 유신들 간에 끊임없이 논란이 돼 오던 소격서는 마침내 임진왜란 이후 1592년(선조 25)에 영구히 폐지되었다. 도교 초제의 대상이었던 칠성 · 옥황상제 · 태상노군(太上老君) · 염라대왕 · 사해용왕(四海龍王) · 신장(神將) 등의 제신격(諸神格)은 소격서가 폐쇄된 뒤에는 민간 신앙에 흡수되었다.

도불잡유적(道佛雜糅的)인 현상은 조선 시대에 들어 와서는 더욱 구체화되고, 이러한 것은 특히 도교의 현세 중심적 사상에 의해 종합되었다. 조선조 후기의 도불잡유적 현상의 대표적인 것이 매복(賣卜) · 기축(祈祝) · 독경(讀經)을 업으로 삼는 소경의 등장이다.

이들 소경들은 각자 맡은 소임이 달랐는데, 이들을 분류하면 매복 · 명과(命課) · 독경의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특히, 명과맹인(命課盲人)의 경우에는 삭발을 한 도불잡유적 맹승(盲僧)이 있었는데, 이들은 선사(禪師)라고도 불리며 사회적 지위도 아주 높아서 왕이 궁궐을 출입할 때 조사(朝士)나 사마(司馬)와 같은 대열에 참가하였다.

독경을 하는 맹인이 사용하던 경은 비불비도(非佛非道)의 경이며, 간혹 불경이나 도경도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맹인들이 독경을 하거나 매복, 기양(祈禳)하는 것은 중국에는 없는 것으로 우리 나라에만 있는 특징이다.

이 밖에 민간의 신앙으로서 고려 때 성행하였던 수경신의 습속이 일부에서 신봉되었고, 전각이나 문루의 기와 위에 신상을 안치하거나 혹은 가옥 신축 뒤에 행하는 안택(安宅) 등이 세간에 널리 행하여졌다.

그리고 칠성 신앙이 두드러졌는데, 우리 풍속 중에 시체를 매장할 때 칠성판을 밑에 까는 것은 칠성 신앙에 근거한 것이다. 사찰에서도 칠성각을 지어 복이나 자식을 얻기 위하여 칠성을 제사하였는데, 이런 것도 도불잡유적인 현상이다.

조선 말기에는 또 각종의 참위설과 풍수 사상이 사회의 혼란에 편승하여 인심을 크게 동요시켰다. 이 때 『정감록』이 크게 유행하였고, 병화(兵火)가 미치지 않는 십승지(十勝地)를 찾아 고향을 등지는 사람들이 속출하였다.

또, 국가적으로 도교가 폐지되고 민간에서는 도교 사상이 미신적 속습으로 흐르는 중에도 진정한 수련을 위한 단학파들은 깊은 산으로 숨어들어 그들의 도맥을 이어갔다.

신라 시대에만 해도 표면에 나타난 선파(仙派)가 근대에 접어 들수록 점차 은둔하여 지금은 그들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찾아볼 수는 없으나, 단학의 성질상 그 맥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때의 단학파로서는 곽재우(郭再祐) · 권극중(權克中) · 이사연(李思淵) 등이 전해 온다.

천주교의 확산과 탄압

병자호란(1636) 이후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는 북경에서 독일인 신부 샬(Schall, A.)을 만나 서양의 과학 기술과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이에 앞서 선조 때 이수광(李睟光) 등이 『천주실의 天主實義』를 소개하였고, 허균(許筠)은 천주교의 기도문을 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천주교와 서양 문명에 대한 포괄적인 평가는 이익에 이르러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는 『천주실의』를 평하여, “천주라는 존재는 유교에서의 상제이나, 그를 공경하여 섬기고 두려워 하여 믿는 것은 곧 불교의 석가와 같다”고 언급함으로써 천주의 초월성과 신앙 대상의 성격을 유교와 구분하여 불교에 견주었다.

그의 제자 신후담(愼後聃) · 안정복은 적극적인 비판을 가하였으나, 18세기 후반부터 성호학파에 속하는 인물 중 이벽 · 권철신(權哲身) · 이승훈 · 정약용 등이 천주교 교리를 신앙하는 데로 발전하였다.

곧, 1777년부터 권철신을 중심으로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회를 열었고,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오는 것을 계기로 1784년부터 신앙 집회가 일어났다.

그리고 1785년에 이들이 중인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신앙 집회를 갖다가 적발, 체포되었으나 김범우만 처벌되었다. 또 1787년에는 이승훈 · 정약용 등이 교리 연구를 위하여 성균관 근처의 사가에 모이는 사실이 동료 유생인 이기경(李基慶) · 홍낙안(洪樂安) 등에 의해 비난받았다.

천주교 신앙 운동이 발전하여 몇 사람의 지하 활동 단계를 벗어나자 전통 사회와의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1791년에 진산군에 있는 윤지충(尹持忠)이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상례를 갖추지 않고, 그의 친족 권상연(權尙然)이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한 일이 드러나면서 본격적인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천주교는 멸륜난상(蔑倫亂常)의 사도(邪道)요, 제사를 폐지하고 예속을 어지럽히는 사설(邪說)이라고 단죄되었던 것이다.

정조는 재위 기간 동안 천주교 신앙 문제를 확대하지 않으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국가의 금교령이 있었으나 중인들의 주도 아래 신앙 운동이 활발히 성장하였다. 1794년 중국의 주문모(周文謨)가 최초의 신부로 입국하였고, 전교와 신앙 생활의 지도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하고 대왕 대비 김씨가 섭정을 하자 천주교도에 대한 대규모 탄압으로 신유사옥이 일어났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전국에 실시하여 천주교도를 색출, 고발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유교전통의 조선정부가 천주교신앙을 국가의 정통성에 대한 거부로 받아들이고 정치적 총력을 기울여 제거, 정화시키겠다는 결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체포령으로 이가환 · 권철신이 매 맞아 죽고, 이승훈 · 정약종(丁若鍾) 등이 참수되었으며, 정약용이 유배되는 등 100여 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되었다. 이때 중국인 신부 주문모도 자수하여 처형되었다.

이에 황사영(黃嗣永)은 북경 주교에게 천주교의 박해와 주 신부의 처형 사실을 알리면서 조선에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여 호소하는 긴 편지(帛書)를 써서 발송하려다 발각되었다.

이를 접한 조선 정부의 입장은 천주교가 교리의 옳고 그름을 넘어 국가 통치권의 자주성과 독립성에 대한 일대 도전적 위협을 보인 데 놀라고, 사교로 대중을 미혹하는 데 앞서 반역적 행위로 판단하였다.

천주교 신앙 운동과 조선 정부의 정통 고수 태도는 순조 이후 더욱 정치적 긴박감으로 대립하였다. 1835년에는 모방(Maubant, P.) 신부를 비롯하여 프랑스 신부들이 잇달아 입국하여 지하 전교 활동을 벌여 교세가 확장되자, 1839년 서양 신부들을 비롯한 다수의 신도가 희생된 기해교난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 때에는 천주교도의 세력에 유력한 사대부 계층은 거의 없고 선비들의 척사 상소도 별로 없었던 사실로 보아 국내 천주교도의 정치 세력이 거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정부가 천주교를 배척하는 과정에서 이를 학문적 내지 신앙적 문제로 다루지 못하고 정치 문제로 가혹화시켰던 이유는 유교 사회에 교화될 수 없는 서민 집단이 형성되어 천주교가 유교 정치 제도 수행에 커다란 불안 요소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최근세의 종교

개화론 · 수구론 · 유교 개혁 운동

대원군은 집정 후 타락한 유림의 세속화를 혁신하기 위하여 정조 때 이미 650개나 되었던 서원과 사우를 47개만 남기고 철폐하는 일대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신성성의 종교적 경험을 통한 새로운 이념적 제시가 없는 한 유교의 자기 개혁은 불가능하였다.

전면적인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는 개화론과 구 제도와 의례를 고수하는 수구론이 대립하는 가운데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변복령과 단발령이 내려졌다. 전통적 제도의 상징이 순식간에 전면적인 억압을 당한 것이다.

병인양요 당시 척양론을 주장하고 나온 이항로를 중심으로 한 척사위정파 내지 한말 의리학파는 서양의 무력 침략에 저항하는 방법을 천주교 교리의 비판과 유교 이념의 재천명에서 추구하였다.

이들은 화하 문화(華夏文化)의 정통성을 밝히고 의리의 비판적 저항 정신을 고취하여 강상(綱常)의 윤리 규범과 예악의 의례 제도를 재현하기 위한 정열과 신념에 넘쳐 있었다.

유중교는 변복령에 대하여, “의복이 바뀌면 명분이 달라지고, 명분이 달라지면 의리가 독립할 수 없다”며 전통 의례를 지킴으로써 유교 정신을 보존할 수 있다는 신념을 밝혔다.

최익현(崔益鉉)유인석(柳麟錫) 등은 위정척사론에 입각하여 외세의 압력에 따라 구 제도를 개혁하려는 개화 정책에 저항하고, 의병 운동을 일으켜 민족적 항쟁을 하였다.

그러나 현실의 변화를 외면한 수구는 객관적 효력을 상실하였고, 마침내 일제의 무력에 분쇄당하고 말았다. 식민지 통치 아래 근대적 개혁을 진행할 때 성균관과 향교 등 유교적 교육 기관은 무력화되고 전통적 사회 제도의 파괴와 타율적인 신 제도가 수립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질서 변화 속에서 유교의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이병헌(李炳憲)은 강유웨이(康有爲)의 영향을 받아 공자교 운동을 전개하며 『유교복원론 儒敎復原論』을 저술, 제시하였고, 신기선(申箕善)은 대동 학회 내지 유교 학회의 조직을 추구하였다. 이승희(李承熙)는 만주에서 공자교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박은식『유교구신론 儒敎求新論』을 통하여 개혁론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유교 개혁 운동은 극소수의 노력이었고, 이 때의 유교는 대부분 새로운 사회 질서의 형성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하였다. 전근대적 · 봉건적 구 질서도 비판의 채찍을 받았으며, 다만 가정 의례로 잔존하고 관습적 도덕 의식 속에 유지돼 왔던 것이다.

불교 교단의 변화

조선 말기를 지나 일제의 침략과 더불어 불교에 대한 탄압을 지양하고 이를 국가의 관리 하에 놓기 위해 1906년에 이보담(李寶潭)과 홍월초(洪月初) 등이 원흥사(元興寺)에 ‘불교연구회’를 설립하였다.

그 이전에는 이곳에 단지 총괄 관리서를 두고 대법산(大法山) · 중법산(中法山) 제도를 실시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관리서는 곧 폐지되고, 승단에서 운영을 맡게 되어 일본 정토종 계열의 불교 연구회가 세워졌던 것이다.

이것이 얼마 가지 않아 1908년에 거국적 교단인 원종(圓宗)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종정 이회광(李晦光)의 일본 조동종(曹洞宗)과의 종속적 연합 계략이 밝혀지자, 박한영(朴漢永) · 한용운(韓龍雲) 등의 반대를 시작으로 1911년 송광사에서 임제종(臨濟宗)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몰락과 함께 불교도 일제의 지배 밑에서 선 · 교 양종의 이름 하에 31개의 본산으로 규합되어 중앙 총무원과 중앙 교무원이 각황사(覺皇寺) 안에 각각 사무소를 두고 서로 다투었다.

그러다가 1925년에는 재단법인 조선 불교 교무원으로 타협점을 찾았고 이것이 발전, 보완되어 1941년에 태고사(太古寺)를 세우고 방한암 선사(方漢岩禪師)를 종정으로 조계종의 발족을 보았다.

광복과 더불어 사찰령이 폐지되고 박한영이 교정(敎正)이 되어 각 도에 교무원을, 중앙에 총무원을 두어 식민지 정책의 불교를 벗는 대중 교화와 교육 · 문화적인 과제를 해결해 갔다.

신흥 종교의 출현

기존의 종교 교단이 지탱해 오던 한 사회의 가치 질서가 붕괴되고 민중의 의식이 동요하게 될 때 새로운 종교가 발생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조선 말기에 민중은 정치적 부패에 시달리면서 각종 재난과 외세의 위협을 당했으며, 종교적으로는 유교 질서가 혼란해져 천주교가 사회 저변에서 지하 운동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연히 현실에 대한 불안과 위기 의식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유교 · 불교 · 도교 등 기존의 교리를 종합, 보완한 새로운 종교가 출현함으로써 민중의 좌절과 염원을 흡수, 극복하려 하였다. 사회 변혁의 측면에서 유토피아의 도래를 염원하는 후천 개벽 사상이 나왔는데, 이는 정감록적 민간 신앙의 구세주 사상과 택지(擇地, 十勝地)사상에 영향받은 바 컸다.

최제우(崔濟愚)동학을 시작으로 김항(金恒)정역(正易)강일순(姜一淳)천지공사(天地公事)가 그 대표적인 예들인데, 이들 종파의 교주들은 대부분 무교적인 체험인 신명 사상(神明思想)의 논리에 기초한 카리스마적 전능을 가지고 출현하였다. 이들은 크게 동학계 · 유교계 · 불교계 · 국조계(國祖系) · 기타 등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① 동학계 : 동학은 우선 그 명칭에서부터 서학(西學, 天主敎)에 대응하는 의미로 붙여졌고, 당시 동양의 중심 사상인 유 · 불 · 도의 3교와는 그 운수[運]와 진리[道]는 같으나 그 이치[理]가 다르다고 하였다.

동학은 하느님(天主)을 내세운 점에서 오히려 서학과 유사한데, 세상이 이토록 어지러운 것은 우리 민족이 믿어 오던 하느님의 뜻(天命)을 따르지 않음이요, 그 뜻을 아는 길이 지성감천(至誠感天)의 방법이라 제시한다.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하느님을 진정으로 공경하게 되고, 최제우가 언급하였듯이 “나의 도에는 성(誠) · 경(敬) · 신(信)의 세 가지가 있으면 그만이다”라는 교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분명히 믿는다는 것이 마음[心]으로 그친다면 불충분하다. 역시 어떤 신체적인 것을 아울러 요구하는데, 이것이 기의 문제이다.

기는 생명을 가지고 운동하는 것이요, 신령한 기운이고 무궁하며 자존하는 것으로 본다. 또, 동학에서는 우주를 하나의 발전, 진화하는 것으로 보고 그 본체 생명을 기로 파악한다. 이 기가 발전하는 과정에 있다며, 현실 세계의 모든 만물의 번성하고 쇠퇴하는 교체를 필연적인 변화로서 조화라고 해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최시형(崔時亨)에 와서 사람뿐 아니라 천지 만물이 다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는 범신관으로 확대되고, 손병희(孫秉熙)에 와서는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이론으로 확대되어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事人如天)’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절대군주 체제 하에서 매몰된 개인의 인격적 가치에 대한 자각인 것이며, 한국적 인간 존중 사상의 한 결실인 것이다.

따라서,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세상을 제도하고 백성을 구한다는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도는 면면히 동학 교도 사이에 흘러 들어 갑오 농민 운동의 지도 이념이 되었다.

동학은 손병희에 의하여 천도교로 개칭, 발전하였고, 시천교(侍天敎) · 상제교(上帝敎, 天眞敎) · 수운교(水雲敎) 등의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다.

증산교(甑山敎)는 동학의 삼교 합일설 내지 인내천의 사상에 『정역 正易』의 후천 개벽론을 첨가하여 ‘천지공사’의 사상 체계를 세웠다. 즉, 말세의 운수를 뜯어 고치기 위해 이념이나 규범과 질서 등을 개혁해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 신(地方神 · 文明神 · 萬古逆神)의 부조화로 인한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통일 신단을 결성하고, 이들의 원한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신명(神明)을 보은(報恩) 줄로 이어 줘 화목 협동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천 시대의 오류를 수정하여 후천의 새로운 세계를 이룩한다는 조화의 이념을 전개하고 있다.

따라서, 선 · 후천의 재난과 액운을 없애어 신명의 원을 푼다는 액운공사(厄運公事), 세계의 분쟁과 반목을 공동체의 이념으로 교화한다는 세운공사(世運公事), 그리고 유교 · 불교 · 기독교 · 민간신앙의 정수를 통일, 결집하여 종교적 합일을 도모한다는 교운공사(敎運公事)의 개혁이론을 내세웠다. 종교의 계열에는 보천교(普天敎) · 태극도(太極道) 등이 갈라져나왔다.

② 유교계 : 정역 이론을 확립한 김항은 스승 이운규(李雲圭)에게서 『주역』을 공부하고 역(易)의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여기서 그는 선 · 후천의 개념을 원리적 의미로부터 역사적 의미로 설정하고, 중국의 원시 경전으로서의 『주역』에서 사상의 실마리를 끌어 오면서 우주의 새로운 질서와 원리를 규명하였다.

음양의 조화를 통한 사회적 평등과 평화를 제시하고 인간의 본성에서 신명성을 계발하여 신과 인간이 합치할 수 있는 경지를 제시한 것이다.

그의 제자 송철화(宋喆和)가 영가무도교(咏歌舞蹈敎)를, 하상남(河相男)이 대종교(大倧敎)를, 황대순(黃大淳)이 대동교(大同敎)를 각각 일으켰고, 증산교의 창시자인 강일순도 이 논리를 체득하였다. 또, 강대성(姜大成)이 개창한 일심교(一心敎)는 유교를 중심으로 제종교의 규합을 추구하고 있다.

③ 불교계 : 조선조 불교가 여러 종파로 분열과 통합을 거듭해 오면서 새로운 종교의 면모를 보이는 것도 많았으나 1916년 박중빈(朴重彬)이 개창한 원불교(圓佛敎)를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다. 그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내걸고 종교 신앙과 도덕 훈련으로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낙원 시대의 건설을 염원하였다.

인류 구원과 평화 세계를 건설하려던 성현들의 깨달음이 모두 하나의 진리라고 하여 법신불일원상(法身佛一圓相)의 진리를 신앙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고 사은(四恩) · 사요(四要) · 삼학(三學) · 팔조(八條)로써 강령을 삼았다.

④ 국조계 : 1893년 김염백(金廉白)으로부터 시작된 단군 신앙은 단군이 신인으로서 이 배달 민족을 가르치고(敎化) 다스리기(治化) 위하여 강림하였다고 한다. “구름 · 비 · 바람 · 우뢰와 해 · 달 · 별들을 차지한 신장(神將) · 선관(仙官)이 다 한배님의 부리심이며, 공자 · 노자 · 석가 · 예수 같은 이도 다 한배님의 나느심이다”라고 하면서, 이 땅의 인간들은 상제국조(上帝國祖)에 순응할 때 구원된다고 한다. 이런 계열로는 대종교 · 단군교 등이 있다.

⑤ 기타 : 관운장의 위엄을 믿고 관운장의 신명을 제사하는 관성교(關聖敎)가 있는데, 관우(關羽)의 묘(廟)는 서울의 동묘(東廟)와 계룡산의 무량천도(無量天道)에 있다.

그 밖에 도교 계통이나 무속 계통의 작은 종파들이 다양하게 발생하여 한정된 지역에서 성장하다가 소멸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근대에 접어 들면서 서구의 문화가 침투하기 시작하여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발전함에 따라 이전부터 내려오던 도교의 여러 속습들이 상당히 퇴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요소들은 여전히 풍습으로서 또는 신앙으로서 민간에서 행해졌다.

이 시기에는 정통적인 도가 또는 도교적 요소가 사회의 표면에서 대부분 사라져 버린 관계로 뚜렷한 문헌이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 드물게 저술을 남긴 이는 1910년대를 전후하여 중국에서 활동하던 전병훈(全秉薰)이다. 전병훈은 그의 저서인 『정신철학통편 精神哲學通編』에서 당시에 전래한 서구 사상은 물론 유 · 불 · 도의 제 사상을 도교의 단학 사상하에 통합하려 하였다.

그는 자신의 도교 사상을 단군의 『천부경 天符經』과 연결시킴으로써 단군을 만세 학술의 조종이라 극찬하여 민족주의적 도교의 요소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의 도교 사상이 종래와 다른 특징은 신선학을 개인적인 선화(仙化)에서 나아가 사회적 대중 구원의 원리로 승화시키고 있는 점이다. 그는 도교의 교리를 서양의 의학설과도 연관시켜 도교의 원리를 현대적인 인식과 체계화로 나아가게 의도하였다.

또, 정신 · 심리 · 도가 하나로 일치함을 밝히면서 도교적 이념에 근거하여 세계 통일 공화 정부를 구상하기도 하였다. 그는 세계의 지도자들이 만약 도교의 신선학에 욕심을 두어 불로 장생의 선학을 익히게 되면 권력에 대한 욕구가 줄어 나라 간의 전쟁이 종식되고 세계에 평화가 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개신교의 전파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는 귀즐라프(Gutzlaff, C.)목사였다. 그는 1832년 서해안 일대에 와서 한문 성서와 교리서를 나누어 주며 전도하고 돌아갔다.

1872년 영국의 매킨타이어(Macintyre, J.)와 로스(Ross, J.) 목사가 만주에 와서 이응찬(李應贊) · 백홍준(白鴻俊) · 이성하(李成夏) · 김진기(金鎭基) 등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했고, 1884년에는 미국 북장로교에서 서상륜(徐相崙) · 정공빈(鄭公斌) · 최명오(崔明梧) · 백홍준을 전도사로 임명하였다.

1887년에는 서상륜이 이 두 선교사와 함께 『신약전서』를 번역, 간행하였으며, 이들 동료와 함께 각지에 흩어져 전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일본에서 활약하던 이수정(李樹廷)도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조하였다.

1882년 미국과 수호 조약이 맺어지고 미국 북장로교 목사 알렌(Allen, H. N.) · 언더우드(Underwood, H. G.)와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 H. G.)가 들어와 본격적으로 의료 및 선교 사업에 종사하였다. 이때 광혜원(廣惠院)이 세워지고 이어 스크랜턴(Scranton, W. B.) · 헤론(Heron, J. W.) 선교사에 의해 제중원(濟衆院)이 개설되어 서양 의술을 통한 선교 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885년 배재학당과 예수교 학당(儆新學校의 전신)이 설립되었고, 1915년에는 연희전문학교라는 고등 교육 기관까지 세워졌다. 1887년 아펜젤러는 정동교회를 세우고, 1895년에는 한국인 자력으로 소래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이를 이어 영국 성공회(1890) · 침례교(1890) · 캐나다 장로교(1898) · 안식교(1904) · 성결교(1907) · 구세군(1908)이 선교 구역을 정하여 사업을 펴나갔다.

1892년 기독교 전교가 금지되었을 때에는 전도사 백홍준이 비밀리에 전도하다 발각되어 옥중에서 사망함으로써 우리 나라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개신교는 전교가 자유로운 시대에 성장하였다.

이 무렵 우리 나라 최초의 교회 신문인 『조선그리스도인회보』(1897)가 아펜젤러에 의해 발간되었다. 그리고 언더우드 · 아펜젤러 · 스크랜턴 · 헤론 등은 성서 번역 위원회를 조직하여 『신약전서』를 간행하였다.

기독교회는 일제에 항거하는 강력한 단체가 되었는데, 해서(海西) 교육 총회 사건, 신민회(新民會) 및 105인 사건(1910), 국민회 사건 등을 비롯하여 3 · 1운동 때 김규식(金奎植) · 여운형(呂運亨) · 안창호(安昌浩) · 이승만(李承晩) · 이동휘(李東輝) 등 기독교인의 국내외 활약이 뚜렷하였다. 또한, 이상재(李商在)와 윤치호(尹致昊)는 여병현(呂炳鉉)과 함께 한국 YMCA를 세워 청년 운동의 디딤돌을 마련하였다.

기독교의 일본화를 도모한 일본의 신종교 정책이 진행되는 한편, 1 · 2차 교회 진흥 운동을 통한 길선주(吉善宙) 목사 등의 신령주의적 부흥회 활동은 이 시대 한국 개신교회의 성격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속적이고 광범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천주교의 전교

천주교의 지하 신앙 활동 기간에 한국 전교를 담당하였던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는 달레(Dallet, C. C.)신부가 『조선교회사』(1874)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1886년 한불 수호 조약의 체결을 계기로 전교의 자유를 확보하고 적극적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1887년에는 원주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던 신학교를 서울의 용산으로 옮겨 예수 성심 신학원으로 명명하였다. 1890년대에는 서울 시내에 약현성당(藥峴聖堂)과 명동성당이 차례로 건립되었고, 여러 수도회와 수녀회의 진출과 함께 고아원 · 병원 등 사회 사업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교육 사업에는 그다지 주력하지 않았고 개신교에 비하면 전교 방법에서 훨씬 소극적 면모를 보여 주었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어느 쪽이나 서양 문명을 배경으로 하였으므로, 개화 이후 근대화과정에서 새로운 시대 조류에 일치하는 종파로서 1900년대 이후 폭발적인 교세의 팽창이 일어났다. 일제의 침략 속에 민족 운동가의 참여가 있었고, 광복 이후 전쟁과 사회 불안 속에서 가속적으로 교세가 확장돼 가고 있는 것이다.

한편, 기독교는 전통 문화와의 이질성으로 토착화의 문제에 많은 난관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전교 활동이 일반화되면서 현대 한국인의 신앙 속에 광범한 조직과 기반을 형성하였고, 사회적 소임도 적극화되고 그 비중도 높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참고문헌

「한국종교의 이해」(『장병길교수은퇴기념논총』, 집문당, 1985)
『한국종교연구』 1·2(윤이흠, 집문당, 1986·1988)
『한국종교문화의 전개』(정진홍, 집문당, 1986)
『한국종교사상사』 2(금장태·유동식,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6)
『한국인의 종교』(윤이흠 외, 정음사, 1987)
집필자
금장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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