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주(竹州) 장씨(張氏)이고 1581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법호는 편양(鞭羊)이고 법명은 언기(彦機)이며, 청허 휴정(淸虛休靜)의 제자로서 청허계 편양파(鞭羊派)의 주1이다.
11세에 출가하여 현빈(玄賓)에게 주2, 묘향산의 청허 휴정 밑에서 수행하여 인가를 받았다. 이후 여러 곳을 두루 다니며 고승들에게 선과 교를 배우고 금강산 천덕사(天德寺), 구룡산 대승암(大乘庵), 묘향산 천수암(天授庵) 등에서 제자들을 가르쳐 명성을 얻었다. 1630년 경기도 삭녕 용복사(龍腹寺)에서 스승인 휴정의 문집 『청허당집(淸虛堂集)』을 새로 간행했다. 이때 5~6년에 걸쳐 승려 교육을 위한 이력 과정의 불서들을 대대적으로 판각하여 전국에 유통했다.
1625년부터 1640년까지는 당시 뛰어난 문장가로 이름난 이식(李植),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에게 『청허당집』의 서문과 휴정의 비문 등을 의뢰하며 임제태고법통(臨濟太古法統)을 제기했다. 임제태고법통은 고려 말 태고 보우(太古普愚)가 원나라의 석옥 청공(石屋淸珙)에게 전수받은 임제종의 법맥을 조선 불교의 법통으로 삼는다는 것으로, 태고 보우 이후 환암 혼수(幻庵混修) - 구곡 각운(龜谷覺雲) - 벽계 정심(碧溪淨心) - 벽송 지엄(碧松智嚴) - 부용 영관(芙蓉靈觀)을 거쳐서 청허 휴정에게로 이 법맥 계보가 이어진다. 이는 이후 조선 불교계의 공식 법통으로 인정되었다.
1644년 묘향산 내원암(內院庵)에서 주3 64세, 주4 53세로 입적했다. 수제자는 풍담 의심(楓潭義諶)이었고 청엄 석민(淸嚴釋敏) · 회경 홍변(回敬弘辯) · 함영 계진(涵影契眞) · 환적 의천(幻寂義天) · 적조 혜상(寂照惠賞) · 자영 천신(自頴天信) 등 많은 제자를 두었다. 언기로부터 시작된 편양파는 조선 후기 불교계의 최대 문파로 성장했고 18세기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영향력을 미쳤다.
조선 후기에는 선 · 교 · 염불을 함께 닦는 삼문(三門) 체계가 확립되었는데 편양 언기는 휴정을 이어 이론적으로 삼문을 체계화했다. 그는 선문(禪門)인 경절문(徑截門)을 ‘능력이 있는 이를 위해 바로 마음을 가리키는 격외(格外)의 선풍(禪風)’이라고 설명하고 간화선(看話禪)을 최고의 수행 방안으로 내세웠다. 원돈문(圓頓門)에 대해서는 ‘그보다 능력이 낮은 이를 위해 의리(義理)를 세우고 언어로 이해하게 하는 교문(敎門)’이라고 하며, ‘본래의 마음을 비추기 위한’ 교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염불문(念佛門)은 ‘서방의 정토를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염불법으로 자신의 마음이 곧 부처이며 자성(自性)이 바로 미타(彌陀)’라고 하여, 수행으로서의 염불선(念佛禪)을 추구했다. 그러면서 사람의 능력이 각기 다르고 그에 따라서 방편도 다르지만 불교의 가르침은 하나이며 선 · 교 · 염불 모두 일심(一心)을 근원으로 하기에 같다고 보았다.
저서로는 문집인 『편양당집』이 있으며, 상권에 수록된 「선교원류심검설(禪敎源流尋劍說)」에서 그의 사상적 특징을 엿볼 수 있다.